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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별별 예술프로젝트 2015 

예술과의 난타전 라운드 1
이아람 개인전, 〈권투하는 예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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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27. ~ 11. 28
안양 복싱체육관


​예술과의 난타전 라운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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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람 작가는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의 다양한 층위를 탐구해온 작가이다. 작가에게 사회는 때로는 아시아라는 특정한 문화권을 가리키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한국이라는 국가, 또는 작가가 거주하고 활동하는 구(區)나 동(洞) 단위의 한정된 지역을 가리키기도 한다. 작가의 이런 관심은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에 참여할 당시, 안양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를 아카이빙 했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의 사회와 예술의 관계에 대한 관심과 고민은 ‘무늬만 커뮤니티’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수원시 팔달구 지동에서 벌인  프로젝트에서도 이어진다. 그룹 프로젝트 외에 개인 작업에서도 작가는 자신의 성향을 또렷이 드러낸다. 이를테면, 사회에 속한 개인의 (부)적응 문제를 다룬 < 단락조력발전기 >(2012)나 2013년 시간당 최저임금을 청년의 행복 문제와 연결해 탐구한 사회연구 프로젝트 < 4860행복자산플랜(HAPPY PROPERTY PLAN PROJECT) >(2013)이 그렇다. 이런 프로젝트에서 작가는 사회와 개인을 대립하거나 충돌하는 관계로 인식하고 그 양자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억압, 갈등, 투쟁, 이탈 등 부정적인 현상에 집중한다.
 
이번 작업에서 역시 작가는 앞선 작업과 동일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에 서 있다. 그러나 이 선에서 한 발 더 들어가서, 작가는 좀 더 자기의 사적 영역에 밀착한 협의의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몸을 매개로 공동체와 예술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를 모색한다. 무엇이 예술로 가능한지, 예술에 어떤 태도로 반응할 것인지, 그리고 이런 질문들에 대해 어떤 실험적 작업으로 고백할 것인지 그 물음의 결이 좀 더 촘촘해졌다는 뜻이다. 그룹 프로젝트에서 작가는 분업의 일부를 맡아 작업을 일구어나가는데, 전체 프로젝트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성실하고 친절한 태도로 진행했다. 대화를 하고, 결과물을 글과 그림으로 정리해 아카이빙해서 누구나 그 의도나 의미를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게끔 한다. 그 방식에 대한 나름의 호오가 있겠으나, 작가가 < 권투하는 예술 >에서 선택한 방식은 뻔하게 진행되어온 이른바 공동체 예술 그것에 조금은 비틀린 의문을 가지는 데서 출발한다. 말하자면, 공동체 예술이 누군가의 일상을 다룬다면, 그 일상에 이미 깊이 들어와 있는 것을 예술로 말해야만 하는 당위성과 예술로 말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규칙과 금기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주요한 장치다.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은 이 규칙과 금기를 암묵적으로 공유한다. 개인이 공동체에 적응한다 함은 공유된 규칙과 금기를 내화하는 것일 텐데, 작가는 내화의 과정이 야기하는 모종의 불편함 혹은 불안함을 주시한다. 그의 집요한 시선은 사회의 부조리한 측면들과 불가해한 문제들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공동체 안에서 규율의 옷을 입은 자기 안의 불편함을 더듬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자기 내면을 살피던 중 작가는 우연히 권투를 접하게 되었고, 권투는 자기 안에 쌓여가는 부정적 심리를 해소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하나의 탈출구이자 동시에 삶의 난투극으로 되돌아오는 출입구가 되었다. 권투라는 낯선 대상이 주는 위험과 모호함에서 자신의 불안과 공포의 출구를 찾은 그는 무대 위에 선 자기(the self)가 발산하는 감정, 몸짓, 순간의 사유 따위의 설익은 것들을 목격한다. 그로써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숨 쉴 틈을 발견한다고 고백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작가는 역설적인 판을 짠다. 앞서 말했듯, 작가는 공동체의 규칙, 규율, 기준을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것들을 권투라는 스포츠의 영역으로 가지고 들어와 공정성, 추동력, 상호 존중, 정당한 경쟁이라는 긍정적인 형식으로 역전시킨다. 규칙은 시합에 참여한 경쟁자라면 누구나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에 기대서 모두가 동등한 자리를 획득하고 존중받을 권리를 가질 수 있다. 나에게 적용되면 너에게도 적용되고, 네가 따라야 하면 나도 마땅히 따라야 하는 것으로서 말이다. 정해진 것을 지켜야만 하는 상황에서 피어오르는 모종의 저항 심리는 이렇게 “잘 맞고 잘 때리는 원초적인 행위”인 권투 안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건투를 비는 응원’으로 전환된다. 권투를 페어플레이를 신조로 삼는 스포츠로 만드는 방식들이 사회와 인간이 관계 맺는 방식과 양태를 추적하는 단초로서의 예술을 하는 방법이 된다. 이제 권투는 예술이 되고, 예술은 권투를 한다. 난타당하며 맷집을 기르고, 격렬하게 훅을 날리며 자신의 가치를 호소하면서, 몸은 베틀의 북처럼 권투와 예술을 하나로 잇고 새로이 짜인 틀은 곧 새로운 인식의 틀이 되어 예술을 한다는 행위를 재정의 한다.
 
권투하는 예술은 회화의 움직임을 권투 시합의 방식으로 운영함으로써 실행된다. 그리고 체육관이라는 작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인물들이 예술로서의 권투를 실행하는 주체로 참여한다. 작가가 설정한 몇 가지 운영 방법은 구체적으로 이렇다. 첫째, 작가가 직접 출전한 시합을 녹화해 링 위에서 상영한다. 둘째, 체육관 관장, 코치, 관원을 인터뷰한 영상이 경기 실황 영상과 교차 상영된다. 셋째, 선정된 선수(관원)가 권투 경기의 한 라운드가 진행되는 시간인 삼 분에 맞추어 붓을 글러브 삼아, 종이를 상대 선수로 삼아 드로잉 스파링을 실행한다. 셋째, 작가가 온몸으로 실행한 ‘권투로 예술하기/예술로 권투하기’의 도정을 다양한 예술 형식으로 풀어낸다. 마지막으로 일련의 기록이 조각, 회화, 공간 드로잉, 설치 등의 모습을 띠고 그것이 이루어졌던 현장인 체육관으로 회귀한다.
 
흥미로운 지점은 영상 작업과 회화 작업, 그리고 체육관에 영구적으로 남게 될 공간설치 작업이 보여주는 리듬감과 존재감의 대비이다. 체육관-전시장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하늘에서 작가의 고백록이 떨어지고 라운드가 끝났음을 알리는 날선 종소리가 들린다. 이 급작스러운 맞닥뜨림 사이에 있는 러닝머신에서 3분간의 드로잉 스파링이 상영된다. 러닝머신에 올라 걸으면서 영상을 보는 관객은 화면 속에서 스파링하는 이의 긴장감을 고스란히 몸으로 느끼게 된다. 링 위에 설치된 투명한 막에 투영되는 경기 실황은 근육의 살아 있는 움직임이 예술의 가장 생생한 비언어적 재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실황 영상과 나란히 상영되는 인터뷰 영상은 반대로 언어를 그대로 재료로 가져오는데, 권투라는(때로는 삶 속의 무엇이든) 동일한 대상이 누군가에게는 삶의 요체이지만, 다른 이에게는 그저 취미 생활의 일환일 뿐임을 일깨우는 어긋난 증언으로서 울려 퍼진다.
 
“복싱은 마라톤이랑 똑같아. 제일 장거리야. 배우는 것도 마찬가지야. 제일 장거리야. 육상선수보다 더 많이 뛰어. 더 힘들어. 계속 뛴단 말이야. … 사람들이 그걸 몰라. 나도 내 친구들에게 가르쳐도 몰라. 나는 복싱이라는 것을 알게 돼서 좋은 것 같아.”
 
작가 역시 권투라는 운동이 장거리 전임을 의식하고 있어서였을까. 앞선 설치들과는 달리 체육관-전시장의 복판에 걸린 회화 속 인물들은 동작의 리듬이 전혀 느껴지지 않게 움직인다. 줄넘기를 시작하는 순간인지, 줄이 넘어가는 순간인지, 그도 아니면 정말로 멈춘 채 포즈만을 취하고 있는지 모호한 장면들의 나열이 전시장을 메우는 긴장감을 누그러뜨린다. 더욱이 체육관의 거울에 달라붙어 떼어질 것 같지 않은 전시 설명 글, 모든 관원이 매일 줄넘기를 하는 마룻바닥에 스프레이로 새겨진 작가의 사유, 언제부터 원래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들보에 자리 잡은 표어는 가장 정적인 모습의 권투하는 예술을 공간에 남긴다.

누구나 ‘미술/예술은 이런 것’이라는 자신만의 정의가 있을 것이다. 미술의 테두리 안에서 먹고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 미술/예술은 종이에 안료로 무언가를 그린 전통적인 회화 장르를 미술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예술에 씌워진 고정된 틀을 보며 작가가 이 프로젝트의 출발선에서 자문했던 물음표, 즉 ‘흔하고 당연한 일상, 그것을 담은 무엇이 예술일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틈을 내보자. 만약 일상이기는 하지만 이전에 읽혀지지 않고 기록되지 않았던 것을 다시 들춰내어 읽고, 일상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언어로 드러내는 것이 예술일 수 있다면, 이아람 작가의 권투하는 예술은 가장 살아 있는 예술의 시도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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