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속삭이는 별스러운 이야기
#1_Prologue
지금이야. 이제는, 가 봐야 해.
다인은 충동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성격이다. 그러나 오늘만은 달랐다. 다인은 아주 오랫동안 미뤄왔던 일을 해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그곳으로 향할 때가 영영 요원해질 것임을. 그러면 고이 간직했던 태초의 안식처는 안락했다는 인상만을 어스름하게 남긴 채 진짜 정체를 감출 터였다. 여러 시간을 달려 도착한 그 집. 할머니와 할아버지 대에서부터 내려온 자신의 근원. 정신의 요람. 자리는 그대로였다. 자리만 그대로였다. 나머지는 그대로인 것이 없었다. 천장이 내려앉았고 벽은 허물어졌다. 곰팡이 슬어 원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구석들은 집이었던 것의 흉내만 겨우 내고 있었다.
저쯤에 누워서 발장난을 했었는데.
어린 시절이 남긴 즐거운 나의 집과 세월이 만든 폐허가 겹쳐 보였다. 다인은 숨이 막히는 것 같다가, 이내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기묘했다. 옷장 속을 돌아다니다 한 덩이 솜처럼 뭉친 먼지. 청소 중에 먼지를 마시면 불쾌하다가도, 말끔해져 가는 방을 보면 개운한 기분이 들었던 이사 첫날이 생각났다. 여기에 살면서 자신이 남길, 그리고 나 다음에 올 누군가가 똑같이 치우며 투덜거릴 먼지 생각에 굳이 이렇게까지 수고할 필요가 있나, 기운이 빠지기도 했던 날. 정신 차리자. 앞으로 살 동안 누릴 안락함은 정돈에서 오는 거야.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지. 다인은 세 번 네 번, 새집을 쓸고 닦는 사람이었다. 그런 다인에게 지금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차곡차곡 개고 잘 쌓아서 마음에 정리하고 싶은데. 언젠가 조심스레 꺼내어 이리 소중한 것이 내 안에 있다 뽐내고 싶은데. 당장은 그럴 수가 없었다.
겨우 여기까지 왔잖아. 이왕 왔으니까, 보고 가는 거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두어 번 더 둘러보자. 소화는 천천히 하더라도.
#2
꽤 마음에 드네. 생각보다 화면이 잘 나왔어.
다인은 자신의 손에서 갓 태어난 새로운 화면을 유심히 보았다. 이것을 보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나, 잠시 셈해보았다. 삼십 년 후에나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 정도면 양호하다고 생각했다. 다인의 눈앞에는 또렷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흐릿하지도 않은 빛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매일 저녁. 밤. 깊은 밤을 지나 새벽녘까지 마주하곤 했던 빛. 투명한 몸을 흔들며 다인의 잠을 쫓아내던 빛이었다. 동그랗게 몸을 말았다가, 어느샌가 기지개를 피며 늘어나던 시간이었다. 다인은 〈Lucid Drift〉를 그리며 그 빛을 맞이하던 공간을 지웠다. 빛이 들어오던 창문을 지웠다. 빛이 맺히던 유리를 지웠다. 대신 빛이 타고 온 시간을 그렸고, 빛이 흐르는 공기를 그렸다.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머릿속으로 되뇌던 결심을 그렸다.
지금이야. 지금이 한 발 나아갈 때야.
다인은 그 한 걸음을 〈Whispering Slit 1〉으로 이어갔다. 〈Lucid Drift〉에서 조심스레 표류하던 빛을 〈Whispering Slit 1〉으로 가져와 면면히 퍼지는 광채로 그렸다. 마흔여덟 개의 장면이 서로의 틈을 내어줌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연작. 빛의 광장光場이다. 광장을 넘나드는 다인의 손길이 경계를 가른다. 그 사이를 틈타 뜨거웠던 낮의 잔광이 산란한다. 익숙했던 틀을 걷어 내자 색이 들어왔고, 정밀한 구조에서 벗어나니 그림이 더 큰 집을 요구했다. 막연하게 품어왔던 이미지가 가로 2미터에 달하는 넓은 풍경이 된 것만도 신기한데, 더 위로 더 높이 향하고 싶어 하는 그림을 보며 다인은 설렜다.
아쉽지만 다음에 마련해줄게. 너한테 어울릴 집을 찾는 중이야. 너는 2가 되고 3이 될 거야.
#3
옮겨왔다고 해야 할까. 떠나왔다고 해야 할까. 그도 아니면 돌아왔다고 해야 할까. 다인은 주어를 ‘나’에서 ‘이미지’로, ‘이미지’에서 ‘나’로 바꿔가며 거듭 자문했다. 바다 건너의 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때 머물렀던 버몬트 레지던시. 그곳의 창틀 안에 그린 〈Morn〉과 〈Night〉는 외갓댁에 보낸 나날들이다. 놀다 놀다 지쳐 스르륵 잠이 들던 유년 시절의 들판. 어둑해지면 어딘가 낯선 기운이 올라오던 뒷산.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했지만, 그래서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기억들이었다. 다인은 자신의 삶에 자꾸만 겹쳐 다가오는 시간과 장면이 무슨 연유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릴 수는 있었다. 버몬트의 창틀을 빌려 외갓댁의 들판을 그렸다. 젊은 시절의 한 막幕을 마치면서 더 어린 시절을 덮고 있던 장막을 열었다. 그렇게 〈Morn〉은 〈Night〉와 짝이 되었다. 살살살 다룬 낮과 따복따복 눌러 표현한 밤이라니. 시간을 벌리고 거리를 띄웠지만 결국은 한 쌍일 수밖에 없는 낮과 밤을 보면서 다인은 생각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다”*는데, 자신이 습관적으로 관찰하던 장면들은 지금 나에게 무엇으로 남아 있나. 그림을 그리려고 보고 또 보고, 곱씹었던 것들을 나는 왜 잡아두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오히려 잘 흘려보내고 싶었던 건가.
#4
생각해 보면, 전시를 연다는 말이 참 이상하지 않은가. 애초에 내 작품을 꽁꽁 싸매둔 적이 없는데. 무엇을 연다는 말인가. 하지만 다인은 이번만큼은 달리 표현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안전하고, 편안하고, 나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고 못 박았던 곳에서 이제껏 몰랐던 균열을 발견했으니까. 완전무결해서 흠결 없는 장소라고 생각했던 안식처의 문을 열고 나와 그린 그림들을 보여줄 거니까. 처소의 닫힌 문에 난 균열 사이로 조용히, 그러나 웅숭깊게 퍼지는 속삭임. 그 소리를 따라 버리지 못했던 것들을 버렸고, 가지고 있던 것들을 더 소중하게 품을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여기가 아니어도 숨 쉴 수 있어. 너로 살아갈 수 있어.
새로 지을 집 문 옆에 달린 문패에는 어떤 이름을 적어도 크게 상관없을 것 같다.
#5_Epilogue
다인은 전시장 출입구 옆, 자그마한 암실에 자그마한 그림을 걸면서 나직이 말을 건넸다. 다인이 밖에서 올려다보곤 하던 창문을 그려 안보다 더 깊은 안쪽에 놓였다. 이번 전시 《Whispering Slit》을 준비하며 수없이 대하던 장면 중 가장 마지막을 차지하던 〈Outhouse 2〉. 깊고 깊은 밤, 2층의 전시장에서 걸어 내려와 건물을 등지고 걷다 뒤돌아보면, 예의 그 하얀 창문이 그 자리에 있었다.
네 자리는 여기야. 내 마음이 보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면 좋겠어. 그동안 고마웠어.
한 걸음, 아니 반걸음이라도 나아가고 싶은 나의 마음을 알까. 누가 알아줄까. 전시 첫날을 열 때까지 동행한 변화, 결정, 내딛음, 망설임, 조바심, 흐뭇함, 설렘, 그리고 환희. 다인은 그런 마음들을 자신의 안이자 밖, 전시장 밖이자 안인 그곳에 두었다. 그 마음들이 모여 돌아서는 다인의 등을 환하고도 따뜻하게 만져주었다.
임나래(독립 큐레이터)
작품 리스트 (글에 나온 차례대로)
〈Lucid Drift〉 연작, 2025, oil on linen, 50×50㎝
〈Whispering Slit 1〉, 2025, oil on wood panel, 200.8×342㎝ (31.8×41㎝ 48pc each)
〈Morn〉, 2025, oil on linen, 227×80㎝
〈Night〉, 2025, oil on linen, 227×80㎝
〈Outhouse 2〉, 2025, oil on linen, 60.0×60.6㎝
* 전인권 작사, 작곡의 〈걱정말아요 그대〉(2004) 가사에서 인용
** 사진제공: 임다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