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아고라
“아고라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창작과 관련한 재교육 및 동료 예술가들과의 교류의 기회를 제공하는 교육 프로그램입니다. 2017년의 아고라는 수직 | 일방적인 교육이 아닌 수평 ― 상호적 교육을 지향합니다. …… 외부로부터의 학습이 아닌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힘을 발견하고 서로를 응원하는 관계를 만들어 나가려 합니다.”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2016년 시작된 아고라는 본래 “졸업 후 다양한 소통과 교육의 기회가 부족했던 예술가들에게 창작 활동의 밑거름이 될 수 있는” 강의와 워크숍을 제공하는 예술가 교육사업이었다. 서교예술실험센터의 스태프가 기획하고 진행하였으며, 일정한 인원의 교육생을 자리에 모아놓고 해당 시즌의 주제에 따른 강의를 강의자가 주도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던 것을 2017년에는 운영단 사업으로 가져와 수평적이고 상호적인 형태에 초점을 맞춘 예술가 재교육 및 교류 사업으로 재편하였다. 모임 지원 프로그램 < 고무동력記 >, 예술계 내 성폭력/혐오와 불평등에 관한 공론장 < 이런 페미니즘 >, 그리고 예술가의 글쓰기 방법론을 다루는 < (진짜_최종)최종_글쓰기 > 세 개의 프로그램이 ‘아고라’라는 큰 틀 안에서 운영되었다.
“이대로 작업해도 괜찮다.”
당시 아고라를 기획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기획자로서* 프로그램에 어떤 장치를 얼마나 할 것이냐였다. 바꿔 말하면 프로그램의 세부 사항을 사전에 확정하지 않고, 참여예술인들이 유연하게 부릴 수 있도록 여지를 얼마나 남길지 고민했었다. 아고라가 고대 그리스 시민의 예술 활용이 이루어졌던 장소였듯이, 2017년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펼쳐졌던 아고라에 모인 참여예술인들 역시 모이고, 나누며, 각자의 필요를 채우기를, 그래서 다음 걸음을 내디딜 힘을 축적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예술인의 고충과 필요를 가장 잘 알았던, 아니 똑같이 겪고 있는 예술가로서 완결된 기획, 일방적인 전달은 지양하고 프로그램 완료 후 성과물 발표 또한 최대한 피하고자 했다. 서교예술실험센터에 모인 예술인이 서로 북돋아 주고 응원하는 시간을 쌓아 “나는 이대로 작업해도 괜찮다.”는 힘을 얻기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 아고라는 말하기를 강요하지 않되 자유로이 말할 수 있고, 제때 제대로 듣기를 놓치지 않는 자리여야 했다.
되감을 수 있는 고무동력記
< 고무동력記 >는 일률적으로 주어진 10분 내외의 시간 안에 새총 쏘듯 던지는 프리젠테이션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업 이야기를 해보자는 시도였다. 지금 하는 -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해결하지 못하고 이어온 - 작업 고민을 포기하지 말자는 것. 5년 후 그리고 또 10년 후에 조금 더 깊어진 고민을 할 수 있도록 지금 나를 띄울 동력을 조금이라도 충전하는 것이 목표였다. 공모로 모인 작가, 기획자, 비평가 등 참여예술인 16명이 직접 조를 짜고, 주제를 정하고, 모임 형태를 정해 약 두 달 동안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고라의 다른 두 사업도 마찬가지지만, < 고무동력記 >가 유독 기억에 남는 이유는 참여예술인들의 이야기에서 동력을 불어넣는 말하기와 듣기의 힘을 좀 더 분명히 확인했기 때문이다.**
들어주는 것과 듣는 것은 다르다. ‘들어주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이 꺼내는 이야기만 듣지만, ‘듣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조차 중요하지 않다고 간과했던 지점, 그마저 스쳐 지나간 부분을 잡아낸다. “잘 듣는 약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잘 듣습니다.”라는 카피가 있다. 듣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해낸다.
소위 ‘예술계’는 교육계, 종교계, 재계 따위와 비교하면 그 경계가 다소 불명확하고 유동적이라고 생각한다. 특정 ‘계(界)’, 즉 한 사회의 특성과 범위가 그것을 이루는 다수의 구성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면, 예술계만큼 구성원 하나하나가 자신을 마음껏 드러내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또 있을까. 그렇다면 흐릿하고 출렁이는 ‘예술계’라는 사회 안에 머무르며 예술가로서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내 안에 단단하게 뿌리내린 자기 확신도 중요하겠지만, 작업을 통해 하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오늘도 여전히 내 활동을 지켜보는 이들 역시 큰 축을 맡고 있지 않을까. 하나의 손이 다시 날아가려 고무줄을 되감을 때, 고무동력기를 단단히 잡고 있는 또 다른 손. 감는 손과 지지하는 손이 모여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위태로워지지 않도록, 언제든 되감아 날아갈 수 있도록.
아고라를 넘어서
되돌아보면, 교육사업으로서 아고라를 기획 및 운영하면서 논의했던 지점들, 특히 이런 방식이 가능할지 의심과 탐험을 거듭하며 성사된 많은 시도가 서교예술실험센터와 공동운영단 그 자체의 여정과 맞닿아 있었다. 공공기관이나 재단은 예술(가)을 ‘지원’하는 ‘사업’을 운영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서교예술실험센터와 공동운영단은 그 자체로 아고라의 역할을 해 오지 않았는가. 예술생태계에서 살아가는/살아가고자 하는 예술가들이 작업을 연장하고 확장할 유무형의 계기들을 만들어 가면서 말이다.
“말하고 듣는 시간들이 길어지고 잦아질수록 우리의 세계는 서로를 지지하며 점차 나아질 것”***이라던 과거의 글귀에 눈길이 머문다. 부디 이 믿음이 예술계 안에서만 울리는 메아리로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이곳의 말들을 듣는 이가 저곳에도 있기를. 더 많아지기를.
* 2017년 아고라는 서교예술실험센터 5기 공동운영단의 사업으로, 강지윤, 임나래가 담당하여 기획 및 운영하였다.
** < 고무동력記 >의 자세한 여정과 기록은 서교예술실험센터 네이버 카페에서 확인할 수 있다.
*** < 이런 페미니즘 >, (재)서울문화재단 발행, 2017, p.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