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이 고요하다. 안팎으로 말소리조차 들리지 않아서이기도 하나, 단정히 놓인 두 작가의 작품이 자아내는 긴장감 탓이 크다. 단번에 눈을 사로잡는 색의 경쟁이나 설치의 화려한 묘(妙)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일까.
전시 첫머리에 작품을 건 이승연은 흑연을 뭉개었다가 지우고 다시 덮기를 반복하여 형상을 만든다. 가로와 세로가 20~30cm 정도인 작은 캔버스에 서서히 나타나는 이 형상을 무어라 할까. 양감과 그림자를 갖추었기에 분명 어떤 물건 같지만, 이승연은 이것이 놓인 맥락을 알려주지 않는다. 비교적 지시적인 단어로 지은 작품 제목을 통해 유추해보지만, 이 또한 시간과 공간에 관한 정보가 없는 화면 앞에서는 무용한 시도이다.
〈A Ghost in the Corner of the Room #2〉(2021)의 하얀 이미지. 제목은 이를 유령이라고 알려주나, 이것이 걸쳐진 헝겊인지 누가 뒤집어쓴 수건인지 혹은 어디에서 잡아끌고 있는 묵직한 덩어리인지 단언할 수 없다. 〈Shallow Lump #2〉(2021)에는 배경과 구분이 어려운 형체가 등장한다. 화면을 위아래로 꽉 채운 이 형체는 화면에 다 담기지 않은 공간 어디쯤 자리하고 있는가. 주 이미지에 견주어 확장하는 배경은 관람자에게 너른 상상의 여지를 제공한다. 〈바람덩어리〉(2021) 연작에는 전체를 드러내지 않고 화면을 꽉 채운 어떤 이미지가 등장한다. 작가가 바람덩어리라 이른 것은 손에도 눈에도 잡히지 않는 바람을 가둔 것을 떠올리게 하지만,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바람 담은 둥근 주머니를 위배한다. 때로는 편편하고 때로는 울퉁불퉁하게, 심지어 뾰족한 각을 이루며 튀어나온 모양새를 띤다. 〈Shallow Lump #1〉(2021), 〈곧 터질거야〉(2021), 〈Burned〉(2021)에서는 빛을 받고 있는지 아니면 빛을 발하고 있는지 확실하지 않은 존재가 등장한다. 작가는 주인공이라 할 이들의 상하좌우를 아주 조금씩, 그러나 단호하게 잘라낸다. 공간을 고려하여 안정적으로 자리하기보다는 주어진 화면에서 언제 벗어날지 모르는, 그래서 다소 위태로워 보이는 이미지들. 그 앞에서 나는 현실감각으로부터 관람자를 멀리 떼어놓는 모호한 좌표와 광원. 제목-언어로 지시받는가 하면 이내 상충하면서 정체를 숨기는 존재들을 본다.
김재연은 채집한 사물의 스캔 이미지를 합성해 상상하는 장면을 구현한다. 김재연은 이승연과 마찬가지로 화면의 시공간 맥락정보를 삭제하여 전면에 등장하는 이미지의 면면을 더 자세하게 살펴보게 한다. 다만 “…… 내 카메라도 망가진 듯 초점이 안 맞기 시작했다. 사진이 선명한 세계라면 지금 나는 모호한 세계에 와 있다.”(〈작업노트〉, (2021))라며, 카메라를 내려놓은 (전직) 사진작가로서 좀 더 시각적인 모호함에 초점을 맞춘다. 나란히 걸린 〈A-side〉(2021)와 〈B-side〉(2021)는 빛이 비치는 반투명한 유리 정도의 밝은 배경, 그 중앙에 화면 가득 자리 잡은 커다란 이미지를 보여준다. 한 대상의 앞면과 뒷면인 듯한 형상을 보며 나는 내부가 치밀하나 불균질하고, 단순하지만 변칙적인 생명체를 떠올린다. 균일하지 않은 테두리와 드문드문 비쳤다 사라지는 그림자를 마주하며 아주 느린 그러나 매우 분명한 생명의 움직임을 연상한다. 〈원〉(2021)과 〈펑〉(2021)은 앞선 작품보다 더욱더 뭉그러지고 흐린 형체를 담았다. 주된 형상 곁에 있는 꽃가루 같은 얼룩이 이리저리 화면 안에서 움직이는 것 같다. 공간을 공유하는 아주 크고 흐릿한 형상과 그 주변을 서성이는 아주 작지만 뚜렷한 형상. 이 둘은 융화와 합치인지 반대로 분열과 독립인지 모르겠을 유기적인 관계를 암시하는 듯하다.
이렇듯 김재연의 작품은 화면의 가운데가 차 있는 듯 비어 있고 배경마저 단일하여, 이미지의 테두리를 따라 눈으로 찬찬히 걷게 만든다. 화면에서 세부사항을 생략하되 몰입할 부분만은 둥실 떠오르게 한다. 작가 자신은 모호한 세계라고 불렀으나, 그 안에서 확실히 바라보아야 할 것을 포착한 셈이다.
김재연과 이승연은 자신의 선명하던 세계를 흔든 변화를 감당하면서, 시선을 정비하고 ‘달라진 경계’를 찾으려 했다고 말한다. 그렇게 이승연은 공간과 구도의 경계를 변주하고 김재연은 초점과 모티프의 관계를 조율하여 이 경계를 드러낸다. 경계란 변화하기 마련이다. 낮과 밤, 여기와 저기, 의도와 우연 등 딱 잘라 구분할 수 없는 것이 허다하다. 확정할 수 없이 요동하는 경계를 더듬는 이미지들. 그 이미지들이 고요한 전시장에서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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