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평구 불광천은 2002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자연형 하천으로 재정비되었다. 현재는 일 년 내내 민물고기와 철새를 구경할 수 있는 살아 있는 하천으로 주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벚꽃 철이나 밤산 책 하기 좋은 계절에는 서울의 산책 명소로 손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불광천은 지하철 6호선 응암역에서 월드컵경기장역 부근까지 흐르는 약 9km의 짧지 않은 천이기에 그 좌우를 잇는 징검다리와 보행교가 여러 개 있다. 그중 최근에 설치된 ‘은평레인보우교(이하 레인보우교)’(2009년 10월 6일 개통)는 보행교로서 본연의 역할 외에, 고즈넉이 북한산을 조망하며 쉼을 즐기는 주민을 품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김리아와 남지우의 〈레인보우 하모니(Rainbow Harmony)〉는 바로 이 레인보우교에 설치된다. 위에서 보면 마치 알파벳 K처럼 보이는 레인보우교는 교량 양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특이한 구조다. 자연스레 분기점에서부터 교량이 끝나는 지점까지 삼각형의 공간이 생겨난다. 두 작가는 다리를 건너면서 그리고 다리 아래를 지나면서도 볼 수 있는 이 삼각형 공간에 설치할 작품을 기획했다. 김리아는 빛이 투과하거나 반사되어 만드는 상을 이용하여 새로운 조화를 끌어내는 〈harmony〉 시리즈를 선보여 왔는데, 〈레인보우 시리즈〉는 이 연장선에 있다.
김리아와 남지우는 무엇보다도 불광천의 다양성과 생명성에 주목했다. 북한산에서 발원한 다양한 어종과 조류의 터전이자 산책로를 찾는 남녀노소와 이들의 반려동물이 어울리는 장소로서 불광천을 작품에 담고자 했다. 이를 위해 작품 제작을 맡은 김리아는 다양한 유기체의 집합을 산의 형태로 표현해온 본인의 작업 언어에 따라, 북한산을 상징하는 삼각형의 틀 안에 각기 다른 모습으로 불광천의 생명체를 형상화한다. 순환하는 하천은 원형으로 표현된다. 이렇게 불광천의 생태계가 200여 개의 오브제로 재탄생한다.
다양한 형과 색, 크기와 조합의 오브제가 빼곡하게 채워진 교량 사이의 공간은 그 자체로 불광천의 생명체를 한데 모은 군집과도 같다. 생명체가 어디에고 자기 삶의 흔적을 남기듯, 〈레인보우 하모니〉가 탄생시킨 생물군집은 땅과 하늘 사이를 유영하며 다리와 산책로 곳곳에 자기를 투영시킬 것이다. 강화유리와 강화아크릴로 제작될 오브제가 낮에는 햇빛을, 밤에는 다리의 조명을 그대로 받아낼 터이기 때문이다. 형형색색의 오브제는 때로는 빛을 반사하여 반짝이고, 때로는 빛을 그대로 투과해 시시각각 새로운 조합의 풍경을 일구어낸다. 섬세하게 짜인 작가의 의도와 우연한 자연의 연출에 따라, 빛과 그림자가 레인보우교의 전후좌우에서 얽히면서 산책자에게 더욱더 풍요로운 시각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레인보우 하모니〉의 유동적인 면모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빛과 오브제의 관계가 소리와의 관계로 확장된다. 두 작가는 레인보우교에 인접한 산책로 바닥에 센서를 설치하고, 이 센서가 감지하는 그림자의 변화에 따라 AI가 음악을 만들어 송출하는 사운드 작품을 함께 설치할 계획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주민참여 프로그램으로 공공미술과 장소성의 의미 확장을 시도한다. 작가가 주민이 스케치한 모빌 디자인을 공모하고, 그것을 아크릴로 가공해 〈레인보우 하모니〉의 오브제와 같은 작품으로 만들 수 있는 키트를 제작하는 것이다. 이 키트를 받은 주민이 모빌을 만들어 자신의 공간에 걺으로써 자기만의 〈레인보우 하모니〉를 감상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한다.
처음 만나는 사이에 이름이 무슨 뜻이냐, 어떤 한자를 쓰느냐고 묻는 경우가 있다. 누군가는 자기를 소개하며 먼저 이름에 무슨 무슨 자를 쓴다고 밝히기도 한다. 호칭은 부르는 소리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많은 의미와 관계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이필립에게는 용산구 후암동이 그런 곳이다. 마을 사람들이 후사를 빌던 동그랗고 두터운 바위인 이른바 두텁바위가 있었지만, 이제는 그 터를 알리는 상징석과 후암이라는 이름만이 남아 있는 곳.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지만, 이름을 따져보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더듬어가며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까지 마음을 쏟게 된 마을. 이필립은 외부인임에도 친밀감을 느꼈던 후암동에 대한 자기의 첫인상을 떠올리며 작품을 기획했다.
두텁바위로는 남산 산책길로 유명한 소월로와 달리 거주지역 안에 자리한 길이다. 이 길은 후암동을 ┛모양으로 크게 감싸며 이어진다. 이필립은 두텁바위로가 거의 끝나가는 지점, 남산으로 올라가는 소월로 90계단에 가까워질 즈음 나타나는 높이 6~8m, 길이 180m의 거대한 옹벽을 《후암마중》 프로젝트의 대상지로 삼았다. 그는 오래도록 벽을 따라 걸으며 살아온 주민에게는 휴식과 재미를 안겨주고, 이곳을 처음 찾는 이에게는 언제까지고 긍정적으로 남을 첫인상을 선사하고 싶었다고 한다.
《후암마중》 프로젝트에서 이필립이 고심한 문제는 높고 긴 벽에서 비롯된 단조로움과 위압감을 파훼하는 것이었다. 그는 먼저 벽을 세 개의 주 공간과 세 개의 보조 공간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6개의 공간에 각기 다른 형태의 작품을 설치하여 기존 벽의 지루한 리듬에 변화를 줌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
첫 번째 주 공간 〈후암동의 기억〉은 ‘남산 끝자락에 있는 마을’로서의 후암동을 보여준다. 후암동의 지리적 특징을 한눈에 보여주는 배경 이미지 위에 작가가 직접 인터뷰한 후암동 토박이들의 말을 더해 완성될 타일 아트 월은 후암동의 지난 시간을 시각적으로 구현하게 될 것이다.
두 번째 주 공간 〈후암동의 순간〉은 이번 프로젝트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일종의 수직 공원이다. 후암로 28마길 끝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 두텁바위로로 들어서면 마주하게 되는 벽면에 설치된다. 프로젝트 대상지가 남산에 인접한 길인데도 지금까지는 높은 벽 때문에 도리어 산의 푸르름이 가려진 장소다. 이곳에 덩굴식물을 이용한 벽면녹화를 실현함으로써 주민에게 한층 더 가까워진 녹음을 선사할 것이다.
세 번째 주 공간 〈후암동의 미래〉는 옹벽의 끝 지점, 즉 후암초등학교 입구 즈음에 설치된다. 마을의 현재를 살면서 동시에 미래를 그려갈 주민이 직접 식재에 참여해 완성하는 주민참여형 벽면녹지이다. 이필립은 성인뿐만 아니라 후암초등학교의 학생들이 식재에 참여할 것을 염두에 두고 〈후암동의 미래〉를 설계했다. 초등학생 학년별 평균 키를 고려해 식재 구조물을 디자인했다고 한다. 두텁바위로의 옹벽을 지나며 일과를 시작하고 마치는 어린이들에 대한 작가의 배려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세 개의 보조 공간은 〈잇기〉 벽이 된다. 〈잇기〉 벽은 벽면을 따라 걷는 보행자의 움직임에 반응하여 빛과 형태를 빚어내는 LED 인터렉티브 아트 월이다. 다소 정적일 수 있는 주 공간의 작품 사이에 배치되어 《후암마중》에 활기와 재미를 더한다. 밤에는 보행로를 밝히는 조명의 역할도 담당한다.
이필립은 《후암마중》을 통해 감상자가 입면을 새롭게 경험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했다고 강조한다. 높은 벽의 수직성을 변주하여 긴장감을 허물고 그 위에 식물, 조명, 텍스트 등을 이용해 율동감과 활력을 불어넣었다. 우리는 일상에서 한결같이 우리 곁을 지키기도 하고, 계절 따라 변화하며 우리를 성장시키기도 하는 다양한 존재들과 관계 맺으며 살아간다. 《후암마중》은 그러한 우리 삶의 걸음걸음이 그대로 벽면에 녹아드는 공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