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선경 작가는 이번 개인전에서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마주칠 법한 행동을 반복하는 인물이나 반복되는 상황을 다채널 연속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준다. 무표정한 인물이 3초 내외의 짧은 시간에 특정한 행동을 거듭 수행한다는 점은 그의 지난 개인전*과 소재 면에서 유사하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손선경은 놀이라 할 법한 회전 운동에 집중한다. 또한 화면의 크기와 분할을 더욱 다양하게 구성하고, 인터렉티브 요소와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접목한다.
전시장 두 면을 가득 채운 〈Long Play 1〉은 명확한 규모나 좌표, 시간대를 가늠하기 어려운 새하얀 화면을 배경으로 한다. 시공간 정보가 제거된 장소에서 시작과 끝이 불분명한 음률이 흘러나온다. 이 클라이맥스 없는 사운드에 맞춰 네 명의 등장인물이 서로 엇비슷한 지름을 그리며 한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맴돈다. 철봉을 타 넘고 킥보드를 타거나 회전봉에 앉아 있는 등 각자가 의탁한 탈 것은 다르지만, 이들의 회전하는 움직임이 한 데 묶여 손선경이 꾸준히 탐구해온 반복성을 드러낸다. 운동의 반복성은 두 눈만 그려진 무덤덤한 얼굴과 만나 일상이 자아내는 무료함, 이변 없는 지속, 여기에서 비롯된 무심함을 표상한다. 하지만 정말로 이것뿐인가? 어떠한 돌출 행동이나 돌발 상황도 없(어 보이)는 안온함을 전시 제목이 가리키는 완벽함과 곧바로 연결할 수 있을까?
여전히 제자리에서 빙빙 도는 저들을 다시 본다. 하나의 기구에 집중한 놀이로서의 동작들이 전개된다. 인물의 움직임에 따라 검은 그림자가 모였다 펼쳐진다. 쉼 없는 운동을 뒷받침하는 추동력이 인물의 한쪽 발끝에, 회전봉의 축에, 철봉을 단단하게 쥔 손아귀에서 잔잔히 뿜어져 나온다. 삶에서 발견되는 동일한 것의 반복이란 실은 미묘하게 달라지는 것들 사이에서의 꾸준한 균형 잡기와 다름없다. 이로써 완벽은 일순간 획득되는 완성형이 아니라 완벽을 향한 연속적 희구希求로 쪼개진다.
〈Long Play 2〉는 〈Long Play 1〉에도 등장하는 회전봉에 앉아 있는 인물을 집중 조명한다. 두 인물이 시계 초침과 같은 기다란 막대의 이쪽 끝과 저쪽 끝에 평행을 이루며 동그마니 앉아 있다. 둘은 앞선 이들처럼 주변이나 서로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정해진 속도를 지키며 안정적인 원을 그린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반복의 동일성이 깨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프레임 밖으로 거듭 벗어나는 궤적은 우리의 시선 밖에서 발생하고 있을 예측불가능한 사건들을 암시한다. 〈Long Play 1〉이 경계 없는 무한한 장소를 제공함으로써 오히려 인물과 움직임을 부각하는 동시에 반복성에 내재한 변화를 은유했다면, 〈Long Play 2〉는 정해진 틀 밖을 상상하게 함으로써 완벽한 회귀에 대한 불안과 의심을 촉발한다.
완벽한 인생이라는 명제를 충족하면서도 배반하는 이러한 이중성은 〈Dogs Bark 연작〉에서 한층 강화된다. 〈Long Play 1〉과 〈Long Play 2〉가 전시된 장소와 분리된 옆 방에서 나지막이 들려오던 〈Dogs Bark 연작〉 속 개의 짖음은 관객이 문을 열자마자 격렬하게 배가된다. 검은 개들은 이미 쉴 새 없이 뛰고 끊임없이 짖고 있었지만 나지막하게 일정한 간격을 취했었다. 그런 만큼 존재감은 희미했다. 그러던 것이 돌연 자기 공간에 들어온 관객의 움직임에 반응하여 정도를 달리하며 관객의 귀에 울음을 꽂는다. 벽면 가득히 우거진 수풀과 오와 열이 흐트러진 채 바닥에 놓인 모니터가 검은 개와의 조우에 혼란함을 가중한다. 이렇게 거듭함의 양상이 당연한 회귀에서 뜻밖의 기습으로 바뀜에 따라, 반복이 우선하여 가져오는 예측 가능성과 안도감 따위는 이제 완전히 부서지고 만다.
패턴 하나, 동작 하나, 흑 아니면 백, 가득 채우거나 없애거나. 손선경이 취하는 형식적 전략은 일견 단순해 보인다. 하지만 그는 표면에 드러난 단순함 앞에서 우리가 그 이면의 불안감, 불안감을 외면하려는 시도, 이 시도가 쌓여 만들어낸 일상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명료함과 무결함의 이어짐을 문득 끊어내는 순간. 그때 발견되는 인생의 역설적인 빈틈을 말이다.
* 손선경 개인전, 《희미한 현재》, 2017. 07. 13 ~ 08. 05, OCI 미술관, 서울.
** 『월간미술』 2019년 8월호 게재 원고
“식욕, 수면욕, 성욕 중 한 가지를 포기하고 살아야 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이런 극한의 질문 앞에서 우리는 삶의 필수조건과 희망 사항을 구분하게 된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서라면 희망 사항보다 필수조건을 우선시하는 것이 이성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논리로 성욕은 삶에서 후순위로 밀려나고, 개인의 성욕과 섹스를 포기함으로써 개인의 생존은 물론 사회 또한 효율적으로 유지되고 관리될 것이라고 믿는다. 연극 < 섹스 인 더 시티 >는 이렇듯 이성적이고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현실에 의문을 제기한다. 필수조건과 희망 사항을 구분하려는 것은 누구의 뜻인가? 우리는 왜 개인의 자유의지에 반하여 무언가를 포기하고 배제해야만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 애초에 이러한 극단적인 질문이 설정 가능한 현실, 이 질문에 개인의 책임까지 옭아 매인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사회가 잘못된 것 아닌가? 연극은 각기 다른 연차의 전·현직 간호사 다섯 명을 중심으로 진단해간다.
못/하는 몸
시작은 병원 비품실. 파란 간호사복을 입은 남녀 간호사 세 명. 이들에게는 제대로 된 자기 자리조차 없다. 그럭저럭 걸터앉아 야식이자 아침으로 간편한 한 입 거리 인스턴트 식품을 먹는다. 그러면서 나누는 섹스 이야기. 남자 간호사 성주는 자신을 향해 표출되는 조직 내 불편감과 성차별을 감수하며 묵묵히 일해왔다. 하지만 그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조루를 앓고 있는 탓에 애인에게 이별 통보를 받았다.
엄청난 강도의 노동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섹스로 푸는 여자 간호사 윤주. 그녀는 섹스를 복식 구기 종목에 빗대며 파트너의 협력을 강조한다. 그렇기에 병원에서와 달리 섹스에 대해서만큼은 싫으면 싫다고, 좋으면 좋다고 말하는 것이 철칙이다. 사랑, 신뢰, 헤어짐의 문제를 섹스, 콘돔, 낙태, 함께하기라는 구체적인 계약서의 말들로 못박아두고 관계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 계약서가 늘 기대했던 미래를 보장하지는 못하는 노릇이다.
경력 19년 차이자 가장 연장자인 여자 간호사 경주. 병원 가까이 살고 싱글이라는 이유로 “독립된 윗 것”으로서 긴급하고 치열한 의료 전장에 우선 투입되곤 한다. 목숨을 내놓고 헐떡이며 일하다 보니 “불현듯이 가임기가 지나가고, 불현듯이 폐경기가 다가온다.”
성주, 윤주, 경주는 같은 직업을 가졌지만 각기 다른 삶을 사는 개인들이다. 그러나 병원은 그들에게 개인의 기본적인 욕구와 희망을 지우고, 그들이 먹는 인스턴트 음식처럼 네 몸이 썩지 않는 한 조직을 위해 일하라고 강권한다. 병원은 뒤에 숨고 간호사들의 조직 문화라는 이름 뒤에 숨어서 말이다. 메르스 바이러스 치료 현장에 내던져진 경주가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 싸우듯, 간호사들은 왜 이렇게 굴러가는지 모를 노동 현실에 괴롭힘당하고 있다. 성욕과 섹스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이와 결부해 연극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노동과 노동하는 몸, 그리고 그 몸이 놓인 현장인 것이다.
밖에서 안으로, 다시 안에서 밖으로
한편 연극은 병원 안에 있다 밖으로 나가거나,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간호사들의 에피소드를 통해 특정한 직업군에 대한 현장 안팎의 편견, 성차별적인 이미지, 노동계약에 대한 상식적인 기대와 이에 대한 배반으로 이야기의 범주를 넓힌다.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임신순번제를 제때 맞추지 못하고 아기를 가진 현주. 현주는 임신 중단과 퇴직 사이에서 고민하다, 끝내 퇴직을 하고 자신이 간호사 시절 야침(야식이자 아침)으로 먹었을 맥 모닝을 만드는 알바생이 된다. 누군가는 “아기가 있으니까 그래도 행복하시겠어요”라고 말하지만, 현주는 쉽게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여자-간호사-언니를 대하는 아이의 태도에서 성별에 따라 직업적 전문성을 뭉개 버리는 사회의 인식을 읽으며 씁쓸함을 느낀다.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남자”가 되기 위해 인공지능 섹스돌을 사겠다는 목표를 가진 승주. 그는 미스터 정규직 나이팅게일이 되고자 했지만, 무슨 뜻인지도 모를 파견근로계약서에 서명하고 나서야 겨우 간호사라는 조직의 말단 계약 인력이 되었다. 권리는 없지만 잘못되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나이팅게일이 된 것이다.
간호사의 끝과 시작에 있는 현주와 승주는 각기 생애 전환기 앞에서 타의로 밀려나는 노동자와 이제 막 사회생활에 뛰어드는 청년 노동자를 대변하는 듯하다. 처한 시점과 상황은 다르지만, 이들 역시 앞선 간호사들과 마찬가지로 삶의 중대한 선택 앞에서 누군가 정해둔 선택지를 강요받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과연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선택이라고 인정해야만 하는 걸까?
가치비교분석수치통계 리서치드라마다큐멘터리
연극은 목표한바 전달을 위해 몇 가지 전략을 사용한다. 인물 사이의 대화를 줄이고 간호사 혹은 노동자의 노동 실태를 일러주는 각종 기사와 보고서의 수적 지표를 제시한다. 많은 정보를 연기를 통해 빠르고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전달함으로써 힘을 얻고자 한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수치통계 앞에서 우리 삶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되어 연극으로 들어가고, 연극은 재차 고증을 거친 탐사 다큐멘터리가 된다. 이로써 의미 있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노동자 개인의 목소리를 대단위 숫자로 치환해 호소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고발한다. 또한 점층적으로 반복되거나 연쇄적으로 대사를 전개하고, 에피소드별로 주된 인물이 처한 상황, 심리, 고민, 대응을 동료 간호사들이 대리하여 내레이션으로 풀어낸다. 이는 너의 문제가 곧 나의 문제이고, 나아가 우리 사회에서 반복되는 병폐임을 깨닫게 한다.
욕망, 실패, 그리고 그 다음
인물은 아니지만 무대 위에서 누구보다도 바삐 움직인 오브제가 있다. 극의 거의 모든 에피소드에 등장했던 붉은 공이다. 파란 간호사복과 대비를 이루는 붉은 공은 무대에 처음 불이 켜질 때 간호사들 손에 하나씩 들려 입장한다. 극의 전반에서 섹스와 놀이의 비유가 되는가 하면, 후반에는 임신순번제의 당첨권 혹은 피임에 실패한 난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다 극의 마지막, 다섯 명의 간호사가 한 명씩 차례로 나와 자기 이야기를 직접 읊조릴 때에는 인물들의 품에 안겨 버려진 욕망, 풀지 못한 고민, 치유되지 않은 아픔, 현재진행형인 과거 따위가 된다. 주목해야 하는 점은 이때의 붉은 공이 다섯 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의 공이 다음 인물에게 넘겨지며 독백의 시간을 함께한다.
선택 아닌 강요 앞에서 포기하고, 체념하고, 거세당해야 했던 사람들. 그러나 그 모든 순간에 있었던 붉은 공을 다시 떠올려 본다. 누군가의 품에서 다른 이의 품으로 전해진 하나의 공. 이 연극은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끝내 버려지지 않는 각자의, 그리고 우리의 붉은 공을 찾으라 권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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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진: 김민기, 류경인, 송김경화, 이유성, 황재희
스텝: 작/연출 송김경화
무대 최현주
조명 문동민
음악 김운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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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기 이미지는 전태일 기념관 홈페이지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