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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기기와 말하기의 역전극〉 

정현용 개인전
《당신의 비밀을 들려주세요》
2016. 1. 5- 2019. 1. 11.
탈영역 우정국

숨기기와 말하기의 역전극
정현용 개인전 | 우정국, 20160105-0111
 
글. 임나래 (미학)
 
 
인간은 자신의 경험을 지나가는 시간에 흘려보내지 않고 말하기를 통해 영속적인 것으로 남기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다. 그래서 인간은 말을 하고, 말한 것을 기록한다. 그런데 말하기는 구조상 말하지 않음을 반대항으로 전제하므로,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은 매 순간 무언가를 말하거나 혹은 말하지 않는다는 선택 앞에 놓이게 된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어떤 사건이나 경험을 말하지 않기로 선택했다면, 그는 그것을 지우고 망각하기로 선택한 것일까. 오히려 그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즉 언어의 기표를 사용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선별과 탈락을 거부하고, 대상의 원형 그대로를 자기 내부에 정착시킨다. 그러므로 ‘말하기’와 ‘말하지 않기’는 서로를 부정하는 행위를 통해 매우 유사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한편 말하기와 말하지 않기라는 행위는 근원적으로 화자와 청자라는 또 다른 이항관계 안에서 성립되는데, 만약 그 관계에 이른바 ‘비밀’이 내용으로 더해지면 그 둘을 둘러싼 양상은 더욱 복잡해진다.
 
정현용은 작품의 모티브를 비밀에서 가져온다. 2012년에 시작된 정현용의 비밀 프로젝트는 공개 모집한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작가에게 자신의 가장 사적이고 은밀한 비밀이야기를 고백하고, 작가가 그 이야기를 이미지로 변환하여 캔버스에 기록하는 중장기 프로젝트다. 작가는 비밀의 본래 뜻에 따라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면서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 일’이라는 제한 조건을 두고, 이 비밀을 10년 동안 누구에게도 노출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걸고 참여자로부터 비밀을 받는다.
비밀을 다루는 그의 작업 방식은 인간의 말하고자 하는 욕망과 말할 수 없음의 교착(交錯) 상태, 혹은 숨기고자 하는 욕망과 완벽히 은폐할 수 없음의 교란을 보여준다. 비밀제공자는 자신의 이야기가 쉬이 맥락을 짐작할 수 없는 색과 형의 조합으로 은유 내지는 암호화될 것을 보장받고 지금껏 숨기고 있었던 무언가를 타인(작가)에게 말한다. 비밀제공자가 공개 모집을 통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는 것을 고려할 때, 그는 자발적으로 비밀을 발설한 것이며 심지어 자신의 고백이 조형 작품으로 제작되어 전시장이라는 공개적 장소에서 내보여지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자기 이야기의 실체만큼은 여전히 비밀로 남겨지기를 바라는 양가적 심리를 경험한다.
비밀을 받은 작가의 경우는 어떠한가? 작가는 한 차례 말하여짐으로써 이제는 비밀이 아닌 것, 그런데도 여전히 비밀이도록 이야기의 실상을 감추면서 동시에 불특정 다수의 관객에게 작품을 매개로 그 비밀을 폭로해야 한다. 이제 작가는 진실한 비밀의 유일한 청자이면서, 비밀 아닌 비밀이 저장되는 장소가 되고, 바라보지만 이해할 수는 없는 ‘공유된 비밀’로서 이야기를 가공하여 전달하는 자가 된다. 이렇듯 비밀 프로젝트는 태생적으로 모순적 맥락에 놓이는데, 화자와 청자 양자가 말하기와 말하지 않기를 반복하면서 비밀의 철칙을 교묘하게 위반하고, 은폐와 폭로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작업의 내용을 구성하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중층적 모순들은 화면 안에서 우연적이고 임의적으로 선택된 듯이 보이는 이미지들의 결합을 일으킨다. 드러내지만 가려야 하고, 그려야 하지만 말하지는 않아야 하는 딜레마 앞에서 작가는 파편화와 재결합의 전략을 선택한다. 비밀이 서술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던 플롯의 연결고리들을 끊고, 시간과 공간을 점유했던 과거의 사건을 분절된 순간으로 응축한다. 작가가 하나의 이야기에서 연속성을 제거하고, 때로는 두세 개의 이야기 조각들을 이어 붙여 재창조한 결과물은 제 모체의 진실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얼마간 그에서 떨어져 독립적이고 고립된 사건으로 존재한다.
작가는 자신이 들은 비밀이야기를 이미지로 변환하는 은유, 상징, 응축, 분절의 과정을 일종의 회화적 ‘결정화(crystallization)’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결정화 작업은 최근작에 이를수록 더욱 복잡하고 조밀한 이미지의 결합을 구축하는 경향을 보인다. 2013년까지의 작업은 하나의 공간이라고 인식될만한 화면 안에 이질적인 사물이나 연계성을 찾기 어려운 희미한 형상들이 공존하는 것에 그치지만, 2014년 이후에 제작된 , < 각각의 찰나 >, < 일식 >, 는 반추상의 이미지와 더불어 다중적인 소실점과 중첩된 공간 구획을 보여준다. 특히 2015년 작인 는 전작들보다 한층 촘촘한 사물의 배치와 세밀한 묘사를 구사한다. 작가는 여러 겹으로 포개 놓은 면들에 청색과 회색을 넓게 펼쳐서 공간감을 제거한다. 깊이가 사라진 화면 안에서 배경과 보색을 띤 모티프들을 대비시켜 전체적으로 원근감을 약화한다. 또한, 반복되는 액자 구조 안에 추상과 구상을 뒤섞은 이미지를 삽입하는 방식은 비밀을 공유한다는 프로젝트 출발점의 모순을 그대로 닮았다. 작가의 숨기고자 하는 강박과 폭로하고자 하는 욕망이 부딪히면서 더 많은 사물·형태·장소가 화면 안으로 끌어당겨지되, 감상자가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유추하지 못하도록 각 요소가 만나 상기시키는 맥락들을 부단히 해체한다.
 
내용을 흩어놓아 이해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작가의 복잡다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감상자는 파편들을 그러모아 이미지로 표상된 과거의 사건과 구술자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결코 닿을 수 없는 원본에 다가가려 노력한다.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미묘한 (비)현실의 세계가 도대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상징은 추출되기 이전의 근원을 기억하게 하고, 은유는 원본을 추리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비정형의 기묘한 형태를 보면서 어떤 구상적인 형태나 의미를 가진 익숙한 형상을 찾아내려고 무의식적으로 노력하듯, 작가가 제시하는 세계를 마주한 감상자는 본능적으로 비밀의 진짜 모습을 듣고 싶어 하고, 발견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수년간 ‘말할 수 없음’의 내용과 상태를 그려온 목적이 의미 전달의 가능성을 실험하거나 보편적인 소통을 유도하는 데 있지는 않은 듯하다. 또는 발설과 폭로에서 오는 쾌감의 발생을 의도한 것도 아니어 보인다. 다만 비밀을 경유해서,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채 여전히 남아 있는 무언가가 개인을 구성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 그리고 그 잔여물을 대면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거듭되는 자문자답의 과정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닐까.
바로 이 지점에서 비밀제공자, 작가, 감상자 모두에게 중요한 매개체이자 프로젝트의 구심점으로 작용했던 비밀의 기능이 더욱 강화된다. 작가가 비밀을 감추려는 일은 그것을 감추어지지 않도록 부각함으로써 오히려 비밀을 전면에 드러내고 만다. 그리고 감상자가 작품에 존재하는 비밀을 항상 인지하도록 작품을 비밀의 구조 속에 구속한다. 그렇기에 비밀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결과물이 쌓일수록 점차 밀도 있고 다채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화면은 곧 프로젝트 안에서 비밀이 연쇄적으로 강화되는 것을 회화성으로 극복해보려는 작가의 열망은 아닌지 짐작해 본다.
 
모든 것을 아는 예외자로서 타인의 비밀을 다루는 부담감, 가리면서도 동시에 읽힐 것을 전제로 그리기를 해나가야 하는 모순된 작업의 반복에 대해 작가는 모종의 피로감을 토로한다. 그런 연유에서였는지 작가는 우정국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프로젝트를 작동하는 기제와 주제의 전환을 꾀한 신작 를 선보였다. 이 작업은 개별적 타인의 비밀을 사회적 의미의 비밀로 이행시킨 것으로, 사회적 금기를 위반한 개인의 비밀이 대중에게 폭로된 상황을 그리고 있다. 사회적 맥락에서 비밀 아닌 비밀, 혹은 역전된 비밀의 구조를 보여주려는 새로운 시도가 작가에게 어떤 새로운 활로를 열어줄지 지켜보아야 할 테지만, 이 움직임이 그의 작업을 전체를 감싸고 있는 비밀의 그물에서 빠져나올 실마리를 제공해주기를 바란다. 정현용의 회화는 비밀이라는 비법이 없이도 충분히 매력적이며 자족적이기 때문이다.
 



서울프린지페스티벌2016 < 올모스트 프린지 >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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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션 3. 이 도시는 예술활동을 원하는가
1부. 예술가는 도시의 삶을 얼마나 바꿔놓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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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술과 도시, 예술가와 도시의 삶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청취자와 전화 연결을 하는 순간을 떠올려보자. 디제이가 자기소개를 권한다. “어디에 사는 누구신가요?” 그러면 청취자의 백이면 백이 이렇게 답한다. “oo동에 사는 아무개입니다.” 묻는 이도, 답하는 이도 머뭇거림이 없다. 단편적인 예이지만, 이 상황은 우리가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을 바로 ‘장소’에 두고 있음을 알려 준다. 자신이 난 곳, 유년기를 보내며 성장한 곳, 그리고 한 명의 사회구성원으로서 역할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곳, 그리고 죽음 이후 내가 묻히고 싶은 곳 등, 장소와 개인은 단지 지리적인 좌표와 그 좌표 위에 존재하는 자의 관계를 넘어서 다양한 의미와 가치를 공유한다. 그렇다면 ‘도시’라는 장소와 개인의 관계는 어떠한가? 산업혁명 이후 근대 도시의 형성으로 인한 시민의 삶 변화나 대도시의 인구 집중 현상에 따른 인간 소외 따위의 거창한 이야기는 제쳐놓자. 동시대 한국의 사정만 놓고 보더라도, 한국의 절반 이상의 개인에게 도시는 곧 ‘자신의 삶과 동일시되는 장소’일 것이다. 이것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이다.
오늘날의 많은 예술가도 삶과 작업의 영역에서 물리적이든 개념적이든 도시에서 자유롭기란 쉽지 않다. 실제로 도시라는 장소는 예술가에게 삶을 탐색하는 하나의 장(場)이자 그 자체로 작업의 주제가 되곤 한다. 비근한 예로 올해 < 올모스트 프린지> 포럼의 구성이 청년의 자립과 예술, 검열과 자유라는 의제를 거쳐 예술과 도시로 이어지지 않는가. 필자는 본 세션에서 제기하는 ‘예술가는 도시의 삶을 얼마나 바꿔놓는가?’라는 질문을 ‘예술가는 도시의 삶에 어떻게 예술로 반응하는가?’로 달리 말해보고자 한다. 이는 예술가와 도시의 삶을 행위자와 대상의 관계로 규정하기보다는 총체적이고 단일하게 설명할 수 없는 동시대 예술 현상의 구체적인 모습을 통해 들여다보고자 함인데, 각각의 예술 활동들이 외연을 확장해 나갈 때 우리의 도시가 예술로 인해 재구성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 기록하고 기억하는 예술가
안양시의 구석구석을 수년간 걸으며 삶의 장면을 수집하는 작가가 있다. 건축가, 조경전문가, 문화연구자, 지역 토박이 등 다양한 사람들과 일종의 탐사대를 조직해서 매주 안양 동네를 여행하는 작가 김혜련이다. 작가에게 안양은 자신의 거주지임에도 심리적으로는 멀고 비어 있는 동네였다고 한다. 자신에게 ‘빈 공간’과 같았던 안양을 걸으면서 이미 그 안에 존재해온 사람들, 삶의 엉뚱한 위트가 축적된 장면들을 모아 애니메이션 〈안양 산책〉(7′13″, 가변크기)를 제작했다. 이는 도시 공간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관찰을 횡적으로 확장해온 작업이라 할 것이다. 작가의 또 다른 작업 < 무인극단 워크맨 >은 안양 마분(현 관양동)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 노인의 인생을 애니메이션으로 풀어내고 프로젝션 맵핑으로 상영한 작업이다. 지역 사회에서 일생을 보낸 노인의 인생사는 도시의 굴곡과 변화와 맞닿아 있기에, 개인의 소사(小事)는 거대 내러티브가 담아낼 수 없는 사회와 시대의 기록이 될 수 있다. 유사한 맥락으로 도시 산책자의 관찰과 기록을 담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예기 작가의 〈충정로 모던〉(2014)도 떠올려볼 수 있다. 재개발로 사라진 도시의 옛 마을 충정로를 산책하며 변화를 기록한 이 프로젝트는 서울의 근대화 과정을 추적해보고 도시에서 남겨진 것과 생성된 것, 버려진 것과 새로운 것에 대한 사유를 사진과 영상, 설치작으로 표현한 작업이다. 도시계획으로 대도시가 세워지지만, 이 계획은 이전에 존재하던 장소의 시간과 역사는 허물어진다. 오랜 터전을 지우고 그 터전에 덧입혀 있던 기억을 지운다. 지우고 걷어내고 밀어내는 힘들에 반작용해 예술가는 존재하던 것들이 모조리 소멸하기 전에 발견하고 기록하고 기억한다.
 
3. 공존하고 교류하는 예술가
원도심 활성화 사업이 수원, 천안, 대전, 부산 등지에서 한창이다. 국가 혹은 지역자치단체 단위의 도시재생사업은 으레 문화예술을 도입한다. 대전은 충남도청 및 관사촌을 활용해 근대문화예술특구를 지정했고, 천안 역시 옛 골목투어 코스 개발이나 프리마켓 조성, 창작 스튜디오 건립을 통한 문화예술 중심의 도시 재생을 도모하고 있다. 문화예술협력네트워크 홈페이지에서 원도심 활성화, 지역재생, 문화재생 등의 키워드로 검색되는 글이 수십 건이다. 필자는 위로부터의 대단위 사업과 신규 정책에 따른 문화예술계의 급격한 변동에는 부정적인 입장이다. 오히려 지역 안에서 그런 움직임을 끌어내거나 적극적으로 참여해 만들어가는 예술 행동들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싶다. 이를테면 종로 세운상가에서 기존 입주민들과 공존하며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가는 작은 예술 공간들, ‘유쾌한 아이디어 성수동공장’과 ‘카페 성수’를 위시해 성수동에 불고 있는 문화예술의 바람, 2006년 설립 이후 안산 지역에서 문화생산과 교류를 위한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실행하는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 4년간 고려인을 비롯한 다문화인들과 축제 및 사진전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아트퍼블릭 모두’ 등이 그렇다. 이들의 작업은 ‘도시민’이 아닌 ‘도시에서 살아가는 개별 주체’에 주목한다. 개별 주체들의 각양각색의 양태를 보여주고, 이들이 여기에 그렇게 있음을 외친다. 도시 외관 정비를 목적으로 예술가들을 일시적 노동자로 활용하는 공공미술정책이나 법으로 정해진 비용을 소비해야 해서 지역적 맥락 없이 설치되는 건축물 미술장식품들보다, 지역 안에서 주체들의 교류점을 부단히 찍어 나가는 이들의 활동이 도시의 예술적 가능성을 열어주는 길을 만들어 나가는 것은 아닐까.
 
4. 파열시키고 드러내는 예술가
도시는 자본의 논리에 따라 재구조화되기를 반복한다. 이러한 도시의 변화에 따른 예술 활동을 논하는데 빠질 수 없는 없는 지역이 있다면 바로 ‘홍대앞’일 것이다. 홍대앞이야말로 1980년대 이후 한국의 문화예술계에서 도시상업화와 맞물려 가장 다단한 변화를 겪은 지역이기 때문이다. 1980~2000년대 동시대 시각 예술 뿐만 아니라 인디 음악 신(scene), 예술 축제의 중심지였던 홍대는 이제 대안적 문화구역이 아닌 젠트리피케이션의 대표지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시시각각 변화하고 사회의 이슈로 떠오르는 홍대앞에서 취해진 예술적 전략은 적응하기보다는 저항하고, 지켜보기보다는 개입하며, 묻어두기보다는 드러내는 것이었다. 2003년 실험극장 ‘씨어터 제로’의 퇴거 명령 및 폐관에 대항해 2004년 홍대앞문화예술인협동조합이 설립되었고, 2009년 서교지하보도 폐쇄에 문화예술인들과 주민들이 목소리를 모아 문제제기를 했으며, 2010년 집행된 강제 재개발에 쫓겨날 위기에 처한 두리반을 지키기 위해 문화예술인들이 투쟁에 결합했다. 2009년 문을 연 ‘서교예술실험센터’ 역시 2013년 닥친 폐관 위기를 지역예술인들의 적극적인 활동 덕에 넘어섰다. 서교예술실험센터를 지키기 위한 이들의 활동은 사막화되어 가는 홍대 문화예술 생태계 보전을 목적으로 한 ‘홍대앞에서 시작해 우주로 뻗어나갈 문화예술사회적 협동조합’의 설립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높아만 가는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연남동, 문래동, 더욱 먼 외곽으로 점점 밀려나는 공간과 작업실들도 있지만, ‘우정국’, ‘손과 얼굴’처럼 새로운 공간이 생겨나기도 한다. 도시의 성장 논리와 예술이 맞부딪히는 곳이 홍대앞 뿐이겠는가. 그런데도 그러한 충돌이 피상적인 화해로 무마되지 않고, 오히려 전면적 쟁점으로 대두되고 때로는 예술의 사회적 실천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장소는 물리적으로 변화할 수 있듯이 문화적으로도 변화할 수 있다. * 요체는 장소가 어떻게 다르게 정의되는가, 그 장소에서 누구는 떠나고 누구는 속할 것이냐, 그래서 어떤 이들의 새로운 공유지로 재구성될 것이냐다. 홍대앞에서 필자가 목격한 장소의 변화는 단지 상업화로 인한 문화예술의 소외가 아니다. 고착화되고 숨겨져 있던 부조리한 도시의 단면을 파열시켜 가장 첨예한 도시의 문제를 드러내내는 예술가들, 이들이 만들어가는 문화적 변화이다.
 
5.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예술가는 도시의 삶을 얼마나 바꿔놓는가? 예술가 자신은 이런 거대한 의제를 설정하고 작업하지 않을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도시와 도시의 장소들에 자신의 문화적·철학적·심리적 측면을 투영하여 반응하는 예술가는 도시에 틈을 내어 예술의 장소를 확보한다. 예술가 자신과 이웃이 살아 숨 쉴 공간을 만든다. 그리고 그 공간이 존재하는 한, 도시는 한순간도 이전과 같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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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진 로버트슨, 크레이그 맥다니엘 지음,『테마현대미술노트』, 문혜진 옮김, 두성북스, 2011, p. 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