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기기와 말하기의 역전극
정현용 개인전 | 우정국, 20160105-0111
글. 임나래 (미학)
인간은 자신의 경험을 지나가는 시간에 흘려보내지 않고 말하기를 통해 영속적인 것으로 남기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다. 그래서 인간은 말을 하고, 말한 것을 기록한다. 그런데 말하기는 구조상 말하지 않음을 반대항으로 전제하므로,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은 매 순간 무언가를 말하거나 혹은 말하지 않는다는 선택 앞에 놓이게 된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어떤 사건이나 경험을 말하지 않기로 선택했다면, 그는 그것을 지우고 망각하기로 선택한 것일까. 오히려 그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즉 언어의 기표를 사용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선별과 탈락을 거부하고, 대상의 원형 그대로를 자기 내부에 정착시킨다. 그러므로 ‘말하기’와 ‘말하지 않기’는 서로를 부정하는 행위를 통해 매우 유사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한편 말하기와 말하지 않기라는 행위는 근원적으로 화자와 청자라는 또 다른 이항관계 안에서 성립되는데, 만약 그 관계에 이른바 ‘비밀’이 내용으로 더해지면 그 둘을 둘러싼 양상은 더욱 복잡해진다.
정현용은 작품의 모티브를 비밀에서 가져온다. 2012년에 시작된 정현용의 비밀 프로젝트는 공개 모집한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작가에게 자신의 가장 사적이고 은밀한 비밀이야기를 고백하고, 작가가 그 이야기를 이미지로 변환하여 캔버스에 기록하는 중장기 프로젝트다. 작가는 비밀의 본래 뜻에 따라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면서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 일’이라는 제한 조건을 두고, 이 비밀을 10년 동안 누구에게도 노출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걸고 참여자로부터 비밀을 받는다.
비밀을 다루는 그의 작업 방식은 인간의 말하고자 하는 욕망과 말할 수 없음의 교착(交錯) 상태, 혹은 숨기고자 하는 욕망과 완벽히 은폐할 수 없음의 교란을 보여준다. 비밀제공자는 자신의 이야기가 쉬이 맥락을 짐작할 수 없는 색과 형의 조합으로 은유 내지는 암호화될 것을 보장받고 지금껏 숨기고 있었던 무언가를 타인(작가)에게 말한다. 비밀제공자가 공개 모집을 통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는 것을 고려할 때, 그는 자발적으로 비밀을 발설한 것이며 심지어 자신의 고백이 조형 작품으로 제작되어 전시장이라는 공개적 장소에서 내보여지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자기 이야기의 실체만큼은 여전히 비밀로 남겨지기를 바라는 양가적 심리를 경험한다.
비밀을 받은 작가의 경우는 어떠한가? 작가는 한 차례 말하여짐으로써 이제는 비밀이 아닌 것, 그런데도 여전히 비밀이도록 이야기의 실상을 감추면서 동시에 불특정 다수의 관객에게 작품을 매개로 그 비밀을 폭로해야 한다. 이제 작가는 진실한 비밀의 유일한 청자이면서, 비밀 아닌 비밀이 저장되는 장소가 되고, 바라보지만 이해할 수는 없는 ‘공유된 비밀’로서 이야기를 가공하여 전달하는 자가 된다. 이렇듯 비밀 프로젝트는 태생적으로 모순적 맥락에 놓이는데, 화자와 청자 양자가 말하기와 말하지 않기를 반복하면서 비밀의 철칙을 교묘하게 위반하고, 은폐와 폭로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작업의 내용을 구성하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중층적 모순들은 화면 안에서 우연적이고 임의적으로 선택된 듯이 보이는 이미지들의 결합을 일으킨다. 드러내지만 가려야 하고, 그려야 하지만 말하지는 않아야 하는 딜레마 앞에서 작가는 파편화와 재결합의 전략을 선택한다. 비밀이 서술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던 플롯의 연결고리들을 끊고, 시간과 공간을 점유했던 과거의 사건을 분절된 순간으로 응축한다. 작가가 하나의 이야기에서 연속성을 제거하고, 때로는 두세 개의 이야기 조각들을 이어 붙여 재창조한 결과물은 제 모체의 진실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얼마간 그에서 떨어져 독립적이고 고립된 사건으로 존재한다.
작가는 자신이 들은 비밀이야기를 이미지로 변환하는 은유, 상징, 응축, 분절의 과정을 일종의 회화적 ‘결정화(crystallization)’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결정화 작업은 최근작에 이를수록 더욱 복잡하고 조밀한 이미지의 결합을 구축하는 경향을 보인다. 2013년까지의 작업은 하나의 공간이라고 인식될만한 화면 안에 이질적인 사물이나 연계성을 찾기 어려운 희미한 형상들이 공존하는 것에 그치지만, 2014년 이후에 제작된 , < 각각의 찰나 >, < 일식 >, 는 반추상의 이미지와 더불어 다중적인 소실점과 중첩된 공간 구획을 보여준다. 특히 2015년 작인 는 전작들보다 한층 촘촘한 사물의 배치와 세밀한 묘사를 구사한다. 작가는 여러 겹으로 포개 놓은 면들에 청색과 회색을 넓게 펼쳐서 공간감을 제거한다. 깊이가 사라진 화면 안에서 배경과 보색을 띤 모티프들을 대비시켜 전체적으로 원근감을 약화한다. 또한, 반복되는 액자 구조 안에 추상과 구상을 뒤섞은 이미지를 삽입하는 방식은 비밀을 공유한다는 프로젝트 출발점의 모순을 그대로 닮았다. 작가의 숨기고자 하는 강박과 폭로하고자 하는 욕망이 부딪히면서 더 많은 사물·형태·장소가 화면 안으로 끌어당겨지되, 감상자가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유추하지 못하도록 각 요소가 만나 상기시키는 맥락들을 부단히 해체한다.
내용을 흩어놓아 이해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작가의 복잡다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감상자는 파편들을 그러모아 이미지로 표상된 과거의 사건과 구술자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결코 닿을 수 없는 원본에 다가가려 노력한다.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미묘한 (비)현실의 세계가 도대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상징은 추출되기 이전의 근원을 기억하게 하고, 은유는 원본을 추리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비정형의 기묘한 형태를 보면서 어떤 구상적인 형태나 의미를 가진 익숙한 형상을 찾아내려고 무의식적으로 노력하듯, 작가가 제시하는 세계를 마주한 감상자는 본능적으로 비밀의 진짜 모습을 듣고 싶어 하고, 발견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수년간 ‘말할 수 없음’의 내용과 상태를 그려온 목적이 의미 전달의 가능성을 실험하거나 보편적인 소통을 유도하는 데 있지는 않은 듯하다. 또는 발설과 폭로에서 오는 쾌감의 발생을 의도한 것도 아니어 보인다. 다만 비밀을 경유해서,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채 여전히 남아 있는 무언가가 개인을 구성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 그리고 그 잔여물을 대면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거듭되는 자문자답의 과정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닐까.
바로 이 지점에서 비밀제공자, 작가, 감상자 모두에게 중요한 매개체이자 프로젝트의 구심점으로 작용했던 비밀의 기능이 더욱 강화된다. 작가가 비밀을 감추려는 일은 그것을 감추어지지 않도록 부각함으로써 오히려 비밀을 전면에 드러내고 만다. 그리고 감상자가 작품에 존재하는 비밀을 항상 인지하도록 작품을 비밀의 구조 속에 구속한다. 그렇기에 비밀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결과물이 쌓일수록 점차 밀도 있고 다채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화면은 곧 프로젝트 안에서 비밀이 연쇄적으로 강화되는 것을 회화성으로 극복해보려는 작가의 열망은 아닌지 짐작해 본다.
모든 것을 아는 예외자로서 타인의 비밀을 다루는 부담감, 가리면서도 동시에 읽힐 것을 전제로 그리기를 해나가야 하는 모순된 작업의 반복에 대해 작가는 모종의 피로감을 토로한다. 그런 연유에서였는지 작가는 우정국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프로젝트를 작동하는 기제와 주제의 전환을 꾀한 신작 를 선보였다. 이 작업은 개별적 타인의 비밀을 사회적 의미의 비밀로 이행시킨 것으로, 사회적 금기를 위반한 개인의 비밀이 대중에게 폭로된 상황을 그리고 있다. 사회적 맥락에서 비밀 아닌 비밀, 혹은 역전된 비밀의 구조를 보여주려는 새로운 시도가 작가에게 어떤 새로운 활로를 열어줄지 지켜보아야 할 테지만, 이 움직임이 그의 작업을 전체를 감싸고 있는 비밀의 그물에서 빠져나올 실마리를 제공해주기를 바란다. 정현용의 회화는 비밀이라는 비법이 없이도 충분히 매력적이며 자족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