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비평 페스티벌 The Critic Festival 2015 >은 시각예술 비평 패러다임의 전환을 위해 기획한 비평워크숍 형태의 새로운 ‘비평예술 프로젝트’입니다. < 2015 비평 페스티벌 The Critic Festival 2015 >은 예술창작과 비평담론을 위해 자유롭게 발화하는 장입니다. 해당 비평의 장에서 비평가로 참여하여, 이미래 작가와 사전에 나눈 이야기를 정리하여 발표하였고 아래에 원고를 옮겨 적습니다.
* 프로그램 소개글 출처: 아트 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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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래:
오늘 이 자리에 처음 온 분들도 계시지만, 제가 어제 한 차례 작업에 대한 비평을 했기 때문에 제가 어제 했던 비평하고 비교하지 않을 수 없네요. 어제는 이미래 작가님과 만나서 나누었던 이야기들, 작업의 언어, 작업을 만드는 조건들에 관해 논리적으로 탐구해보고 그것의 의미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반면에 김시하 작가님의 작품에 대한 글은 제 스스로 보기에 감상문에 가깝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어제의 글과 다릅니다. 스스로 이런 형식의 글이 나온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작가님과 미팅을 하기 전에 리서치 해보고 이미지를 봤을 때 작품을 분석하거나 이해하려 하는 시도에 앞서서 다가오는 지점들이 분명히 있었고, 그래서 그런 것들을 비평으로 풀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을 기반으로 글을 써서 감상문과 같은 글이 나온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써온 글을 차분히 읽으려고 하는데요. 그에 앞서서 작가님이 직접 작업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시겠습니다.
김시하:
안녕하세요? 저는 설치미술가 김시하 입니다. 지금 뒤에 보여드리는 영상은 제가 2014년 겨울 타이페이 아티스트 빌리지에서 제작한 영상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제목은 < 리얼판타지(Real fantasy) >라고 하는데, 제가 주로 찾으려고 하는 키워드라고 생각하는 내용인 현실과 이상의 대립, 간극,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고 본 영상이 주제를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여겨져 선택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짧은 시간 안에 제 작업을 한마디로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 작품을 언어화하는 것은 비평가 임나래 선생님께 맡기고 저는 저의 작업 방식,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이 더 저의 작품을 읽으시기에 편하실 거란 판단이 듭니다.
여행방식을 예로 들자면 한나라에 집중적으로 머물면서 그 나라의 면면을 깊게 보는 여행가(작가)가 있고 여러 국가를 자유롭게 유영하면서 여행하는 여행자(작가)가 있을 것입니다. 전 후자의 여행방식을 지닌 작가입니다. 저는 작품을 할 때,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을 사용하고요. 매체나 방식, 형식 개념까지도 즉흥적으로 영향을 받아서 제작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방식, 형식과 매체, 개념을 넘나들면서 ‘나’라는 예술가를 표현하고 있는데요. 나라는 사람 내면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모든 것들과 관계를 맺고 탐구하면서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2005년도에 홍익대학교 앞에 에스파스다빈치라는 대안공간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곳에서 개인전을 하는데 예술가의 정원이라는 네모 형태의 구조물을 만들었는데요, 이 전시공간이 지하였어요. 그렇다 보니 나무로 만든 구조물의 본드 냄새와 나무 향 때문에 종일 눈이 시린 겁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전시장을 찾은 많은 관객이 제 전시장에서 펑펑 우시게 되었어요. 옛날, 지금처럼 시각적인 자극이 없던 시절에는 화가나 조각가의 작품을 보고 충격을 받거나 기절하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나중에 코르셋 때문에 숨을 못 쉬어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현시대에는 작품을 보고 눈물을 흘린다거나, 강한 충격을 받는다거나 사실 그런 일이 많지 않지요. 그런데 어쩌다 보니 본의 아니게 제 전시장에서 작위적으로 눈물을 강요하는 흥미로운 일들이 생긴 겁니다. 그 상황을 모르고 밖에서 나오는 관객들만 본다면 아주 감명 받아 나오시는 것처럼 보였을 겁니다. 그때 제가 가진 의문이란 두 가지인데요, 아마 그 의문이 지금까지도 제가 창작활동을 영위하는 가장 큰 목적 또는 이유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는 바로 내가 디디고 있는 현실과 예술로 구현하고자 하는 이상치의 간극이 무엇일까, 그 사이에서 예술가가 추구하는 것을 무엇일까 하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근원적으로 나라는 예술가는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그런 질문들을 했을 때 강하게 다가왔던 명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문구를 하나 들려드리고 마치려 합니다. 『돈키호테』 책 속의 명언입니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
임나래:
저는 아까 보셨던 < 리얼판타지 >라는 작업 말고 < 시각정원 >이라는 작업의 영상을 틀고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김시하:
시각정원이라는 전시설명을 제가 잠깐 드릴게요. < 시각정원 >은 제가 작년 9월 문화서울역 RTO 스페이스에서 열었던 전시 제목입니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라는 작가의 겨울 정원에서 영감을 받아서 작품제목을 시각정원이라고 지었는데요, 마크 트웨인이 본인의 집 마당에 굉장히 아름다운 정원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정원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는데 겨울에는 정원을 사용할 수 없으니 집 안 서재에 이름 하여 ‘겨울정원’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겨울정원은 살롱처럼 , 문학가, 예술가, 무용가, 연극배우 등 여러 사람들이 모여 창작을 발표하고 서로 교류하면서 굉장히 열정적으로 겨울을 보내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본 전시는 2010년부터 2014년까지의 저의 작업을 혼합적으로 설치하면서 시각예술이라는 장르로 발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각정원이라고 붙였고, 저의 전시 장소가 마크 트웨인의 겨울 정원처럼 잠시 동안이라도 시각으로 그 느낌을 공유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습니다.
임나래:
김시하 작가는 현실에서 쉬이 접할 수 있는, 어쩌면 그것을 떼어놓고는 우리의 삶의 이야기하기 어려운 사물들을 가져와 현실이 아닌 무엇을 이야기합니다. 예컨대 식탁, 그릇, 화분, 의자, 포크와 나이프, 화분, 울타리처럼 일상적인 사물들로 일종의 판타지적 상황을 만드는 식입니다. 작가의 손을 거쳐 가지런히 자기 자리에 놓인 사물들은 여전히 일상의 맥락을 상기시키지만, 그것이 내뿜는 분위기는 기이하게 정제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 상상을 해보았던 것이 달걀의 껍데기와 알맹이 사이, 안과 바깥의 사이에서 양쪽 모두와 밀착해 있는 얇은 막이었습니다. 김시하의 작업은 현실에 겹쳐져 있는 비현실성을 끌어들이고, 현실과 가상을 오가며 모호한 경계막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작가의 노트를 보면 이런 말이 있더라고요. “이런 경계, 가상의 세계를 넘나들면서 관객이 거기에 자신을 대입해서 또 하나의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작가가 관객이 시각정원을 거니는 경험을 통해 파생되는 비가시적인 영역 그것까지 자신의 작품의 주체로 설정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관객이 실제로 산책길을 거닌다는 신체적인 경험, 그것만으로 작품과 관객이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질문하게 됩니다.
어둑한 정원에 들어서서 작가가 가꾸어놓은 나무와 테라리움, 벤치를 차례로 거쳐 지나가면서 관객이 수행하는 일은, 오히려 관찰이나 관조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무의 잎이 돋아나고 다시 줄기가 마르고, 그 사이에서 노닐던 나비가 어느 순간 생명을 잃어 온실 바닥에 떨어졌을 때 그것을 보고 꺼내고 다시 새로운 나비를 넣을 때, 작품이 담고 있는 그 모든 생성과 소멸의 순간은 관객의 경험에 개입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작가의 몫으로 남겨진 듯합니다. 그렇기에 작가가 “작품과 관객과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보이지 않는 영역”에 대해 말을 한다면, 이 영역을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조건들은 ‘작품 사이를 걷는다’는 관객의 행위, 또는 소요의 순간에 도출되는 상상, 관객의 지위가 예술의 주체로 이동하는 것 따위가 아닌 듯합니다. 저는 그런 복잡한 조건들을 내려놓고 조금은 순수하게 보고 싶습니다. 달리 말하면, 가공의 세계, 인위적이기 때문에 자연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심미적 가능성의 세계로서 이 작품의 가능성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 시각정원 >과 사용되고 있는 사물들은 비슷하지만, 제목은 다릅니다. 이 작품의 제목은 < 유토피아(Utopia) >입니다. 상상으로는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더욱이 ‘작가’라는 이름에는 부여된 창조의 권한은 상상의 가능성을 무한대로 확장시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김시하 작가는 이 무한한 가능성을 구체적인 현실성의 내러티브를 묘사할 때 발동시킵니다. 이것이 저에게는 “리얼한 것이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리얼하지 않은 것이 대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비현실적인 무엇이 현실의 대체재로 기능할 수도 있다는 말인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졌습니다. 김시하의 작품이 형상화하는 세계는 전시장 바깥의 세계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대체해주기를 바라는 열망이 담긴 지금 여기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 작업들은 안과 밖이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것, 리얼 판타지가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것, 삶에는 그렇게 대립적이고 이질적인 것들이 어쩔 수 없이 공존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합니다. 그래서 작가의 작업은 현실을 대신할 완벽한 유토피아로 인도하거나 현실의 너머를 보게 만들기보다는, 되려 현실에 덧붙여진 것들을 떼어내고 의도적으로 지워진 것들을 되살려서 더욱 또렷하게 현실을 바라보게 합니다.
공교롭게도 이 작품의 제목이 < 비평의 바다 >이더라고요. 저는 비평이라는 단어보다는 ‘바다’라는 단어에 주목했습니다. 앞서서 말했듯이 감상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짧은 글에서 가장 많이 반복해서 말했고, 작가님의 노트에서도 가장 많이 반복했던 단어는 현실, 진실 이런 키워드였습니다. 그것은, 이전에 작가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현실, 그 안에 현실이 아닌 것, 무엇이 진실인가에 대한 고민들, 그리고 그 단어로 유추할 수 있는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진실과 허구, 죽음과 상처, 존재와 부재 등 다른 작품들에서도 너무 많이 말하고 있는 것들이긴 하지만 이 작품에서 만큼은 그런 대립항들의 간극을 걷어내고 보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을 두고 작가님께서는 예술과 가치에 대한 진실의 고민에서 출발했다고 하셨는데, 저는 그런 고민 보다는 일종의 비애감을 느꼈습니다. 작품에서는 진실의 문제나 가치와 같은 것이 아니라 예술가로서 작가 자신에 대한 고백처럼 느껴졌는데요. 그래서 이 작품에 문제되는 것은 예술가로서의 작품과 자신이 아닐까 싶습니다. 작품과 작품 뒤에 숨어있는 현실의 간극, 언제 닿을지 모르는 끝을 향해서 헤엄치는 작가의 모습을 상상이 됩니다. 사실 작품 전체의 모습은, 다양한 모습들이지만, 다이빙 대, 그리고 저 아무것도 놓이지 않는 저 무(無)와 같은 공간을 보면서 제가 이해 할 수 없는 현실과 창작의 사이에서 고민하는 작가의 모습이 상상이 되었습니다. 그 안에서 언제 닿을지 모르는 저 간극이 아물어지는 끝을 향해 유영하는 작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키에르케고어(Kierkegaard)의 한 문장이 떠오르는데요, “인간이란 남에게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수수께끼다. 나는 나 자신을 연구한다. 그래서 나는 그런 나 자신을 연구한다.” 이 말을 떠올리면서, 뭔가 명쾌하게 풀리지 않은 나라는 예술가를 구성하는 요소들 그런 것들에 대한 고민, 그런데 그런 고민이 아직은 어떤 해답이나 그 한 단계 진전된 이야기를 아직은 보여주지 않고, 그 사이에서 계속되는 흔들림, 충돌, 그 자체를 맴돌고 있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비평 페스티발에 대한 리뷰
김시하 작가
창작자의 입장에서, 이 행사는 내가 작품을 보여주려 한다면 적절하진 않다. 아티스트 토크가 아니다. 이 페스티벌은 발표라는 형식이 존재하지만 그 중점은 '관계와 대화' 이다.
15분의 작가, 비평가의 발제는 짧고, 단편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쩌면 비평이라는 언어 중심보다는 이 발제 섹션에서는 발표자의 행위, 또는 언어를 사용하는 '드러나는' 방식에 더 초점이 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사실 난 일을 다 잠시 접어두고 3일 내내 모든 발제를 들었는데, 듣는다는 것도 이렇게 힘든 일이 될 수 있구나를 몸소 체험했다. 모든 섹션에 똑같은 집중도를 발휘하기 힘들 뿐더러 어려운 단어 하나하나의미까지 생각해야 하는 것이 ,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주어진 제약 이 없이 발제하면 된다고 생각했다가(그렇다면 작품을 프레젠테이션하게 적절할 터) 신진 비평가 분과 매칭이 된다는 것을 알았고 15분을 서로의 소통 범위 안에서 '말하기'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땐 당혹감마저 밀려왔다.
그런 배경에서 만나게 된 비평가 임나래 씨는 논리적이고 시각적인 것을 언어화하는데 능통했다. 내가 사용할 수 없는 단어들을 사용하고 숨겨진 내러티브를 구성하는데에 탁월했다. 그렇게 구성된 우리의 발표는 사실 신선하지도, 감각적이지도 않았지만 나는 내 작품을 언어화하는 일에 있어서 임나래씨를 통해 많은 영감을 받았다. (아마 나뿐이 아니라 이 페스티벌에 참가한 여러 작가/ 비평가분들이 서로에게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실제로 평론가, 큐레이터 분들과 레지던시나 전시 서문, 원고 등으로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평을 듣는 일이 자주 있고, 가끔은 나의 강한 조력자가 되어 주시기도 하며, 서로에 대해 영감을 주고받는 공생관계로 발전하기도 한다. 물론 때때로 오독으로 인한 뒤틀림도 발생하지만,
나의 사견으로는, 행사가 더 길고 , 더 다양한 분들이 참여하고, 기성작가, 평론가분들도 더 많이 오시고, 긴 토론 시간이 주어졌으면 좋겠고, 나처럼 서로서로 오가는 격한 토론을 기대하는 이들이 환호할 만한 일들이 벌어질 충분한 시간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17일보다 18일이 좋았고 18일보다 19일이 더 좋았는데, 오히려 19일은 오전 11시부터 시작되었다.
모든 것은 어떤 식이든 짧게라도 코멘트 되는 게 맞다고 본다. 반응을 하는거,
장이 열리면, 판이 짜지면 ,와, 신난다, 하고 그냥 나서면 된다. 그래서 페스티벌, 아닌가.
임나래 비평가
비평 페스티벌은 ‘비평’이라는 것을 예단하거나 제한하지 않고 행위 그 자체로 열어놓는 데서 시작했습니다. 이 출발점에서 작가와 비평가, 강연자, 그리고 청중 각자가 자유롭게 비평의 가닥을 펼쳐나갔고, 그것이 다시 때로는 부딪히고 때로는 조력하면서 여러 개의 매듭으로 엮여나갔습니다. 그렇게 엮인 발화들은 일견 임의적 조합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다양한 배경과 실행의 개인사를 가진 미술 주체들이 ‘비평’의 시공간을 공유하고 서로의 목소리를 들으며 쌓아나간 비평의 면면들이 임의성을 뛰어넘어 유기적이고 생생한 이 시대의 비평 현장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 총괄기획 | 강수미 미학|미술비평|동덕여자대학교 교수 |
전담진행 | 비영리 단체 ART FREE |
후 원 | 동덕여자대학교. 아트선재센터. 글항아리. 디자인 달 |
일 정 | 2015. 6/ 17(수), 18(목) 동덕아트갤러리 |
| 2015. 6/ 19(금) 아트선재센터 씨네코드 선재 |
상단 작품 캡션
좌) 시각정원 .visual garden part_130x70x200cm_식물, 나비,아크릴, 스텐_2014
중) 유토피아_mixed media_300x300x540cm, 2010
우) resize_Real fantasy_단채널_000400_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