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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비평 페스티벌 
          The Critic Festival〉 

말과 예술 | 2015년 6월 17일
이미래 작가 X 임나래 비평가

 
2015 비평 페스티벌 The Critic Festival 2015 >은 시각예술 비평 패러다임의 전환을 위해 기획한 비평워크숍 형태의 새로운 ‘비평예술 프로젝트’입니다.  < 2015 비평 페스티벌 The Critic Festival 2015 >은 예술창작과 비평담론을 위해 자유롭게 발화하는 장입니다. 해당 비평의 장에서 비평가로 참여하여, 이미래 작가와 사전에 나눈 이야기를 정리하여 발표하였고 아래에 원고를 옮겨 적습니다.

* 프로그램 소개글 출처: 아트 프리  
twitter.com/CriticFestival​
facebook.com/CriticFestival

 
이미래:
안녕하세요? 이미래 입니다. 미술대학 학부를 마친 것을 기준으로 말씀을 드리면 2-3년 가량 독립적으로 작업을 해왔습니다. 지금까지는 주로 공모를 통한 플랫폼에서 작업을 발표하거나 개인적인 프로젝트를 꾸려 진행해왔고, 입체 매체를 많이 다루는 편입니다.
 
임나래:
안녕하세요? 저는 대학원에서 미학과 석사 과정의 졸업을 앞두고 있는 임나래 입니다. 기획이나 비평이나 정확히 무엇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그리고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와중에 기회가 되어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행사를 통해서 이미래 작가와 나누었던 이전 작업들에 대한 이야기, 아직 기획 중에 있어 실행되지 않은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문답의 형태로 전달해드리려 합니다.
 
이미래 작가가 인사 중에 말씀하셨듯이, 졸업 이후 작업이 2~3년 정도 진행되었고 전시나 프로젝트가 그 횟수로만 보면 적지는 않지만, 사전 리서치 과정에서 찾을 수 있었던 작가의 작업 이미지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작업 < 수석장 Ⅱ >(2015)를 이미지로 대했을 때 ‘이것을 도대체 어떤 작업이라고 내가 얘기할 수 있을까?’,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이것을 무엇이라고 규명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고민이 어쩌면 현대미술을 향해서 흔히 가해지는 비판들, “난해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작가가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서 하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는 아닌가?” 등의 비판과 같은 맥락에서 가졌던 고민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작업을 규정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내려두고, 우선은 눈에 포착되는 재료에 주목해보았습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전통적인 조각의 재료들, 정적인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쇠나 돌, 시멘트, 나무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다만 색다르게 다가온 지점이 있다면, 중성적 물성이 강조되는 재료들이 다뤄지는 방식입니다. 작가는 자신이 택한 재료들을 역학적인 구조물로 엮어 장면을 연출합니다. 두 번째 작업은 첫 번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작업인데, 인사미술공간에서 이뤄진 개인전 < 낭만쟁취 > 전시의 한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작가는 물성이 강조되는 재료들을 택하고, 그것들을 역학적인 원리나 물리적 법칙으로 연구해서 구조를 만들어 장면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동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제가 실제로 전시를 보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소리를 낸다거나, 또는 운동성을 보여주는 키네틱아트(Kinetic Art)와 같은 부분도 있습니다.
 
작가가 만든 구조물은 완결된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재료들이 만나서 탄생시킬 수 있는 무수한 가능성 중에 하나로 다가옵니다. 선택된 오브제의 결합과 배치에 따라 성격과 모습이 달라지는 설치 작품이기 때문에,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일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이미래 작가에게는 작업의 기저를 형성하는 그 무엇보다도 가장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어서, 조각적 행위 자체에 그만큼 성실하고 착실하게 임해야 한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그러니까, 이 작가에게는 자신의 작품이 보여주는 결과적 풍경보다, 그 결과물을 얻어내기 위해 자신이 재료에 조각적인 행위를 가하고, 그렇게 결과물을 쟁취해나가는 일련의 움직임들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래 작가에게 조각의 재료는 특정한 사물로 고정되지 않습니다. ‘조각’하면 흔히 떠올리는 재료들을 포함해 기계장치, 아니면 < 청개구리 엄마무덤 > 작품의 제목에서 감지되는 구전 동화, 비애나 낭만과 같은 정서, 창 너머의 자연 풍경, 순수예술로 분류되지 않는 만화, 그 무엇이든지 자신의 작업의 재료가 되고 예술적 형상화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작업의 언어를 고정하지 않는 이유에 관해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이미래:
어떤 개인이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욕구를 갖는다면 작업 말고도 얼마든지 더 훌륭한 수단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전 작업이 작업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보여줄 때 쾌적함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이는 물론 작업물이 지금까지 전개되어온 미술의 언어를 구사하는 행위를 포함합니다. 제가 거의 모든 작업행위를 매체적 고민과 결부시키는 경향도 이런 데서 나오는 게 아닌가 싶고요.
 
 
임나래:
왜 이런 방식으로 작업하는지 본인의 작업관에 관한 이야기와 연결이 될 수 있을 듯한데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어요?
 
이미래:
저는 이따금 어떤 작업이 정말 좋다고 느낄 때 감각 기관이 하나 더 생기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좋은 작업들은 물화된 것이 아닐지라도 그 작업의 현전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감각적 카테고리를 제공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궁극적으로는 비슷한 일이 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작업행위라는 것 자체와 그 관념에 천착하는 경향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작업 언어를 계속 사용하는 데에서 찾아질 거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는 모양입니다.
 
 
임나래: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는 새로운 기관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는 말에 동의가 됩니다. 이것은 분명히 예술만이 해낼 수 있는 고유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경험을 바탕으로 인식하니까, ‘감각 기관’이라고 하면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오감을 먼저 떠올릴 테지만, 작가님이 말씀하신 ‘예술이 생성하는 새로운 감각 기관’은 그것들과는 전혀 다른 수용기일 것입니다. 오감으로 감각되거나 설명되지 않을 수 있지만, 작업만이 전달할 수 있는 감각을 감지하는 수용기 말입니다. 예를 들면,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나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가 말하는, 우리가 지각할 수 없는 대상 앞에서 느끼는 숭고가 있을 것이고,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회화 앞에 섰을 때 엄습하는 심연도 한 예로 떠오릅니다.
 
여기에서 이런 궁금증이 생깁니다. 만약 어떤 것이든 조각의 재료로 포섭할 수 있고, 예술 작품이 이전에는 있는지조차 몰랐던 새로운 차원의 감각을 깨어나게 할 수 있다면, 이 두 가지 원리가 만나는 작품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까 하는 궁금증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미래 작가님이 구상하고 있는 차기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미래:
보시는 이미지는 최근 작업 < 가로눕히기 >에 대한 스케치인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직 실행되지 않은 작업입니다. 최하늘 작가와 협업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설명해 드리면 마리나 아브라모빅(Marina Abramovic)의 원작 (1977) 자체를 재료로 두고 오브제를 다루듯 이걸 눕히고 원작의 시간적인 조건을 스트레칭 하는 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임나래:
발표 계획을 위해서 이 작업에 대해 이야기할 때, 에스키스를 보고 조금은 당황했습니다. 비평을 위한 프레젠테이션이라고 한다면, 완료된 작업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통상적일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해보니, 작업을 발전시키는 과정이나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크리틱이 아니라서 다른 방식으로 작업을 풍부하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이것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아직 시작되지 않은 프로젝트를 이 자리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이유가 있나요?
 
이미래:
우선 홍보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고요, 다른 많은 프로젝트들과 마찬가지로 전시 기회를 찾지 않으면 보여주기 힘들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비평 페스티벌이 스스로를 내어놓는 방식과 관련해 발표자들의 발표 대상이 꼭 완성된 무엇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느낀 것 같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경우에는 더욱 스케치 한 장으로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실행은 정말 마치기 위해 필요한 것이고 실행이 없이도 다 된 무엇에 가깝다고 느꼈기 때문이에요.
 
임나래:
요약하자면, 아브라모빅의 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물리적인 재료로 본인의 작품에 가져오겠다는 거네요. 앞서 이야기했듯이, 작가님은 평소 정적인 사물의 성질을 실험하면서, 그 결과들을 역학적으로 엮어내고 구조화하는 작업을 해오셨고, 동일한 과정의 선상에서, 이번에는 너무나 유명한 아브라모빅의 퍼포먼스 자체를 자기의 조각적 작업의 재료로 바라보는 데서 출발했네요. 그런데 많은 함의를 가지고 오랜 세월 동안 회자되어 온 아브라모빅의 퍼포먼스를, 게다가 2010년에 뉴욕에서 재현되기까지 한 이 퍼포먼스를 왜 택해야 했을까요?
 
이미래:
우선 이 부분은 제 작업에 대해 소통을 해야 하는 시점에서 제가 자주 부딪히는 어려움인데요. 표면에서 작업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의 필연성에 대해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거기에 대해선 저 같은 경우 작업을 할 수 있게, 작업이 가능하게끔 해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채택을 합니다. 아브라모빅의 원작과 같은 경우에도 원작을 구성하는 일차적 조건들이 물리적 요소들인데, 여기에 직접적인 힘을 가할 수 있다는 게 재밌어서였습니다. 설치 작업에서의 일상적 행위는 오브제를 비스듬히 놓는다든가 눕혔다가 세웠다가 한다든가 하는 일일 테고 시간예술(비디오 아트/ 미디어 아트/ 키네틱 아트)을 할 때는 듀레이션(duration)을 얼마나 줄지를 결정하면서 결과물의 결을 가늠하고요. 이건 제가 느끼기에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차원의 일들, 붓질을 이렇게 한다 저렇게 한다와 크게 다르지 않은 공정들이고 그것이 재료를 다루는 일일 것입니다. 원작을 눕히고 그 듀레이션을 늘릴 수 있다는 건 제게 그렇게 재료를 쓴다는 느낌이에요.
 
임나래:
제가 < 가로 눕히기 > 작업을 봤을 때, 심플하고 명료한 발상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한 가지 의구심이 드는 건 관객의 위치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아마도 작가님은 이 작업이 ‘관객참여형’이랄지 ‘인터랙티브 아트(Interactive Art)’와 같은 단어로 불리기를 원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런데도 관객이 이 작업을 구성하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서 기능한다면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관객을 모집할 필요가 있을까, 이 프로젝트에 불필요한 맥락을 가져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지금 계획은 관객이라기보다는 협조자에 가까운데, 그렇다면 관객 모집이 아니라 다른 퍼포머를 데려와 작업을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관객의 위치가 원작과 구분이 되는 지점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해 보입니다.
 
이미래:
여기에 대해서는 저도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지금 시간이 부족해서 너무 아쉽네요. 사실 사전미팅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 재미있다고 느꼈던 부분들이 있었고 발표 때 꼭 나누고 싶었는데 많이 아쉽습니다. 마지막 코멘트 정도만 덧붙이면서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임나래:
작업의 양이 쌓인다고 해서 작업이 확실하게 규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래 작가는 언어로 택하는 재료 하나하나보다는 자기의 문법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중점을 두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계속 다른 재료들, 다른 발상들을 조각적인 과정을 통해서 자기의 문법으로 정교하게 만들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작가가 찾아가는 작업적 문법의 의미소들이 모여 어떤 얘기를 보여주게 될지 기대합니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이 자리가 저에게 무겁게 느껴지는 것처럼, 저의 이 말들이 의미에의 강요나 깊이에의 강요가 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이미래:
임나래님과는 사전 미팅을 두 번 가졌고, 작업 언어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많이 나눈 것 같습니다. 제 경우엔 작업 언어를 만든다는 일에 어려움을 많이 느끼고요, 프레젠테이션 자리에서도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작업 언어가 산만하다, 혹은 궁극적으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들인 것 같아요. 그럴 때마다 익숙한 어려움이 있지만 임나래님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다시 한 번 느낀 것은, 하나의 언어로 묶이는 작업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을 하나로 묶어내는 언어가 존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가끔은 작업보다 재밌는 것이 그 부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비평 페스티발에 대한 리뷰
 
 
이미래 작가
 
처음 이연숙 비평가에게 본 행사를 소개받았을 땐 작가가 전면에서 비평가에게 주어지는 재료이자 제물로써 기능한다는 지점에 매력을 느꼈다. 임나래 비평가와 사전 미팅을 진행하면서는 작가 초년생의 입장으로서 작업을 읽는 사람들을 마주하는 경험, 그들의 관심과 고민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는 지점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흥미로웠다. 지나고 나서는 오고 간 담화들보다 행사의 구성과 현전 자체가 작가를 작가의 내적 세계로부터 떨어트려놓는 거리두기를 가능케 했던 것 같다. 그 부분은 내게 있어 무척 유효한 경험이었고 외부로 작업을 내어놓고자 하는 친구들에게도 같은 이유로 권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행사의 진행에 있어서는 기획자 일인의 카리스마에 거의 모든 부분을 기대고 있다는 인상이 있었다. 피날레로 마련된 자유발화 시간은 급작스러운 초대작가들의 프레젠테이션과 질의응답으로 제 기능을 하지 못했으며 결과적으로 행사의 전체 취지를 무색케 할 정도의 갈증을 남겼다. ‘자유발화’는 상황적인 한계로 밀려나고 유예되었던 이야기들이 펼쳐질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고, 그 기능은 행사 초반에도 기획자의 목소리를 통해 몇 차례 강조된 바 있다. 비평 페스티벌이 스스로를 내걸었던 캐치프레이즈들 중 하나가 ‘자유로운 언어의 향연장’임을 되새겨 볼 때 그와 가장 가까웠을 자유발화 시간의 완전 증발에 대해서는 깊은 의문과 섭섭함이 남는다. 그럼에도 행사 내내 참여자들에 대한 대내외적 존중과 격려가 충분히 이루어진 부분은 무척 좋았다. 페스티벌의 최초 발화로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도 잔상이 남아있는 희미하고 유연한 연대감도 비평 페스티벌이 제공한 멋진 경험들 중 하나였다. 여타의 미술 공동체에서 느낄 수 없었던 부분이었기에 더 인상 깊었다. 도와주시고 이끌어주신 아트프리 스텝 분들과 강수미 선생님, 임나래 비평가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 비평 페스티벌이 올해를 기점으로 연례행사가 된다면 시작하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벅찬 경험이 될거라 생각한다.
 
 
 
임나래 비평가
 
비평 페스티벌은 ‘비평’이라는 것을 예단하거나 제한하지 않고 행위 그 자체로 열어놓는 데서 시작했습니다. 이 출발점에서 작가와 비평가, 강연자, 그리고 청중 각자가 자유롭게 비평의 가닥을 펼쳐나갔고, 그것이 다시 때로는 부딪히고 때로는 조력하면서 여러 개의 매듭으로 엮여나갔습니다. 그렇게 엮인 발화들은 일견 임의적 조합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다양한 배경과 실행의 개인사를 가진 미술 주체들이 ‘비평’의 시공간을 공유하고 서로의 목소리를 들으며 쌓아나간 비평의 면면들이 임의성을 뛰어넘어 유기적이고 생생한 이 시대의 비평 현장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총괄기획
강수미 미학|미술비평|동덕여자대학교 교수
전담진행
비영리 단체 ART FREE
후 원
동덕여자대학교. 아트선재센터. 글항아리. 디자인 달
일 정
2015. 6/ 17(수), 18(목) 동덕아트갤러리
 
2015. 6/ 19(금) 아트선재센터 씨네코드 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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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비평 페스티벌 
          The Critic Festival〉 

말과 예술 | 2015년 6월 18일
김시하 작가 X 임나래 비평가

 
2015 비평 페스티벌 The Critic Festival 2015 >은 시각예술 비평 패러다임의 전환을 위해 기획한 비평워크숍 형태의 새로운 ‘비평예술 프로젝트’입니다.  < 2015 비평 페스티벌 The Critic Festival 2015 >은 예술창작과 비평담론을 위해 자유롭게 발화하는 장입니다. 해당 비평의 장에서 비평가로 참여하여, 이미래 작가와 사전에 나눈 이야기를 정리하여 발표하였고 아래에 원고를 옮겨 적습니다.

* 프로그램 소개글 출처: 아트 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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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ebook.com/CriticFesti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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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래:
오늘 이 자리에 처음 온 분들도 계시지만, 제가 어제 한 차례 작업에 대한 비평을 했기 때문에 제가 어제 했던 비평하고 비교하지 않을 수 없네요. 어제는 이미래 작가님과 만나서 나누었던 이야기들, 작업의 언어, 작업을 만드는 조건들에 관해 논리적으로 탐구해보고 그것의 의미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반면에 김시하 작가님의 작품에 대한 글은 제 스스로 보기에 감상문에 가깝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어제의 글과 다릅니다. 스스로 이런 형식의 글이 나온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작가님과 미팅을 하기 전에 리서치 해보고 이미지를 봤을 때 작품을 분석하거나 이해하려 하는 시도에 앞서서 다가오는 지점들이 분명히 있었고, 그래서 그런 것들을 비평으로 풀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을 기반으로 글을 써서 감상문과 같은 글이 나온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써온 글을 차분히 읽으려고 하는데요. 그에 앞서서 작가님이 직접 작업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시겠습니다.
 
김시하:
안녕하세요? 저는 설치미술가 김시하 입니다. 지금 뒤에 보여드리는 영상은 제가 2014년 겨울 타이페이 아티스트 빌리지에서 제작한 영상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제목은 < 리얼판타지(Real fantasy) >라고 하는데, 제가 주로 찾으려고 하는 키워드라고 생각하는 내용인 현실과 이상의 대립, 간극,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고 본 영상이 주제를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여겨져 선택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짧은 시간 안에 제 작업을 한마디로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 작품을 언어화하는 것은 비평가 임나래 선생님께 맡기고 저는 저의 작업 방식,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이 더 저의 작품을 읽으시기에 편하실 거란 판단이 듭니다.
 
여행방식을 예로 들자면 한나라에 집중적으로 머물면서 그 나라의 면면을 깊게 보는 여행가(작가)가 있고 여러 국가를 자유롭게 유영하면서 여행하는 여행자(작가)가 있을 것입니다. 전 후자의 여행방식을 지닌 작가입니다. 저는 작품을 할 때,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을 사용하고요. 매체나 방식, 형식 개념까지도 즉흥적으로 영향을 받아서 제작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방식, 형식과 매체, 개념을 넘나들면서 ‘나’라는 예술가를 표현하고 있는데요. 나라는 사람 내면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모든 것들과 관계를 맺고 탐구하면서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2005년도에 홍익대학교 앞에 에스파스다빈치라는 대안공간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곳에서 개인전을 하는데 예술가의 정원이라는 네모 형태의 구조물을 만들었는데요, 이 전시공간이 지하였어요. 그렇다 보니 나무로 만든 구조물의 본드 냄새와 나무 향 때문에 종일 눈이 시린 겁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전시장을 찾은 많은 관객이 제 전시장에서 펑펑 우시게 되었어요. 옛날, 지금처럼 시각적인 자극이 없던 시절에는 화가나 조각가의 작품을 보고 충격을 받거나 기절하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나중에 코르셋 때문에 숨을 못 쉬어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현시대에는 작품을 보고 눈물을 흘린다거나, 강한 충격을 받는다거나 사실 그런 일이 많지 않지요. 그런데 어쩌다 보니 본의 아니게 제 전시장에서 작위적으로 눈물을 강요하는 흥미로운 일들이 생긴 겁니다. 그 상황을 모르고 밖에서 나오는 관객들만 본다면 아주 감명 받아 나오시는 것처럼 보였을 겁니다. 그때 제가 가진 의문이란 두 가지인데요, 아마 그 의문이 지금까지도 제가 창작활동을 영위하는 가장 큰 목적 또는 이유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는 바로 내가 디디고 있는 현실과 예술로 구현하고자 하는 이상치의 간극이 무엇일까, 그 사이에서 예술가가 추구하는 것을 무엇일까 하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근원적으로 나라는 예술가는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그런 질문들을 했을 때 강하게 다가왔던 명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문구를 하나 들려드리고 마치려 합니다. 『돈키호테』 책 속의 명언입니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
 
 
임나래:
저는 아까 보셨던 < 리얼판타지 >라는 작업 말고 < 시각정원 >이라는 작업의 영상을 틀고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김시하:
시각정원이라는 전시설명을 제가 잠깐 드릴게요. < 시각정원 >은 제가 작년 9월 문화서울역 RTO 스페이스에서 열었던 전시 제목입니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라는 작가의 겨울 정원에서 영감을 받아서 작품제목을 시각정원이라고 지었는데요, 마크 트웨인이 본인의 집 마당에 굉장히 아름다운 정원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정원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는데 겨울에는 정원을 사용할 수 없으니 집 안 서재에 이름 하여 ‘겨울정원’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겨울정원은 살롱처럼 , 문학가, 예술가, 무용가, 연극배우 등 여러 사람들이 모여 창작을 발표하고 서로 교류하면서 굉장히 열정적으로 겨울을 보내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본 전시는 2010년부터 2014년까지의 저의 작업을 혼합적으로 설치하면서 시각예술이라는 장르로 발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각정원이라고 붙였고, 저의 전시 장소가 마크 트웨인의 겨울 정원처럼 잠시 동안이라도 시각으로 그 느낌을 공유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습니다.
 
임나래:
김시하 작가는 현실에서 쉬이 접할 수 있는, 어쩌면 그것을 떼어놓고는 우리의 삶의 이야기하기 어려운 사물들을 가져와 현실이 아닌 무엇을 이야기합니다. 예컨대 식탁, 그릇, 화분, 의자, 포크와 나이프, 화분, 울타리처럼 일상적인 사물들로 일종의 판타지적 상황을 만드는 식입니다. 작가의 손을 거쳐 가지런히 자기 자리에 놓인 사물들은 여전히 일상의 맥락을 상기시키지만, 그것이 내뿜는 분위기는 기이하게 정제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 상상을 해보았던 것이 달걀의 껍데기와 알맹이 사이, 안과 바깥의 사이에서 양쪽 모두와 밀착해 있는 얇은 막이었습니다. 김시하의 작업은 현실에 겹쳐져 있는 비현실성을 끌어들이고, 현실과 가상을 오가며 모호한 경계막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작가의 노트를 보면 이런 말이 있더라고요. “이런 경계, 가상의 세계를 넘나들면서 관객이 거기에 자신을 대입해서 또 하나의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작가가 관객이 시각정원을 거니는 경험을 통해 파생되는 비가시적인 영역 그것까지 자신의 작품의 주체로 설정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관객이 실제로 산책길을 거닌다는 신체적인 경험, 그것만으로 작품과 관객이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질문하게 됩니다.
 
어둑한 정원에 들어서서 작가가 가꾸어놓은 나무와 테라리움, 벤치를 차례로 거쳐 지나가면서 관객이 수행하는 일은, 오히려 관찰이나 관조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무의 잎이 돋아나고 다시 줄기가 마르고, 그 사이에서 노닐던 나비가 어느 순간 생명을 잃어 온실 바닥에 떨어졌을 때 그것을 보고 꺼내고 다시 새로운 나비를 넣을 때, 작품이 담고 있는 그 모든 생성과 소멸의 순간은 관객의 경험에 개입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작가의 몫으로 남겨진 듯합니다. 그렇기에 작가가 “작품과 관객과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보이지 않는 영역”에 대해 말을 한다면, 이 영역을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조건들은 ‘작품 사이를 걷는다’는 관객의 행위, 또는 소요의 순간에 도출되는 상상, 관객의 지위가 예술의 주체로 이동하는 것 따위가 아닌 듯합니다. 저는 그런 복잡한 조건들을 내려놓고 조금은 순수하게 보고 싶습니다. 달리 말하면, 가공의 세계, 인위적이기 때문에 자연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심미적 가능성의 세계로서 이 작품의 가능성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 시각정원 >과 사용되고 있는 사물들은 비슷하지만, 제목은 다릅니다. 이 작품의 제목은 < 유토피아(Utopia) >입니다. 상상으로는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더욱이 ‘작가’라는 이름에는 부여된 창조의 권한은 상상의 가능성을 무한대로 확장시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김시하 작가는 이 무한한 가능성을 구체적인 현실성의 내러티브를 묘사할 때 발동시킵니다. 이것이 저에게는 “리얼한 것이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리얼하지 않은 것이 대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비현실적인 무엇이 현실의 대체재로 기능할 수도 있다는 말인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졌습니다. 김시하의 작품이 형상화하는 세계는 전시장 바깥의 세계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대체해주기를 바라는 열망이 담긴 지금 여기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 작업들은 안과 밖이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것, 리얼 판타지가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것, 삶에는 그렇게 대립적이고 이질적인 것들이 어쩔 수 없이 공존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합니다. 그래서 작가의 작업은 현실을 대신할 완벽한 유토피아로 인도하거나 현실의 너머를 보게 만들기보다는, 되려 현실에 덧붙여진 것들을 떼어내고 의도적으로 지워진 것들을 되살려서 더욱 또렷하게 현실을 바라보게 합니다.
 
공교롭게도 이 작품의 제목이 < 비평의 바다 >이더라고요. 저는 비평이라는 단어보다는 ‘바다’라는 단어에 주목했습니다. 앞서서 말했듯이 감상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짧은 글에서 가장 많이 반복해서 말했고, 작가님의 노트에서도 가장 많이 반복했던 단어는 현실, 진실 이런 키워드였습니다. 그것은, 이전에 작가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현실, 그 안에 현실이 아닌 것, 무엇이 진실인가에 대한 고민들, 그리고 그 단어로 유추할 수 있는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진실과 허구, 죽음과 상처, 존재와 부재 등 다른 작품들에서도 너무 많이 말하고 있는 것들이긴 하지만 이 작품에서 만큼은 그런 대립항들의 간극을 걷어내고 보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을 두고 작가님께서는 예술과 가치에 대한 진실의 고민에서 출발했다고 하셨는데, 저는 그런 고민 보다는 일종의 비애감을 느꼈습니다. 작품에서는 진실의 문제나 가치와 같은 것이 아니라 예술가로서 작가 자신에 대한 고백처럼 느껴졌는데요. 그래서 이 작품에 문제되는 것은 예술가로서의 작품과 자신이 아닐까 싶습니다. 작품과 작품 뒤에 숨어있는 현실의 간극, 언제 닿을지 모르는 끝을 향해서 헤엄치는 작가의 모습을 상상이 됩니다. 사실 작품 전체의 모습은, 다양한 모습들이지만, 다이빙 대, 그리고 저 아무것도 놓이지 않는 저 무(無)와 같은 공간을 보면서 제가 이해 할 수 없는 현실과 창작의 사이에서 고민하는 작가의 모습이 상상이 되었습니다. 그 안에서 언제 닿을지 모르는 저 간극이 아물어지는 끝을 향해 유영하는 작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키에르케고어(Kierkegaard)의 한 문장이 떠오르는데요, “인간이란 남에게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수수께끼다. 나는 나 자신을 연구한다. 그래서 나는 그런 나 자신을 연구한다.” 이 말을 떠올리면서, 뭔가 명쾌하게 풀리지 않은 나라는 예술가를 구성하는 요소들 그런 것들에 대한 고민, 그런데 그런 고민이 아직은 어떤 해답이나 그 한 단계 진전된 이야기를 아직은 보여주지 않고, 그 사이에서 계속되는 흔들림, 충돌, 그 자체를 맴돌고 있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비평 페스티발에 대한 리뷰
 
 
김시하 작가
 
창작자의 입장에서, 이 행사는 내가 작품을 보여주려 한다면 적절하진 않다. 아티스트 토크가 아니다. 이 페스티벌은 발표라는 형식이 존재하지만 그 중점은 '관계와 대화' 이다.
15분의 작가, 비평가의 발제는 짧고, 단편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쩌면 비평이라는 언어 중심보다는 이 발제 섹션에서는 발표자의 행위, 또는 언어를 사용하는 '드러나는' 방식에 더 초점이 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사실 난 일을 다 잠시 접어두고 3일 내내 모든 발제를 들었는데, 듣는다는 것도 이렇게 힘든 일이 될 수 있구나를 몸소 체험했다. 모든 섹션에 똑같은 집중도를 발휘하기 힘들 뿐더러 어려운 단어 하나하나의미까지 생각해야 하는 것이 ,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주어진 제약 이 없이 발제하면 된다고 생각했다가(그렇다면 작품을 프레젠테이션하게 적절할 터) 신진 비평가 분과 매칭이 된다는 것을 알았고 15분을 서로의 소통 범위 안에서 '말하기'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땐 당혹감마저 밀려왔다.
그런 배경에서 만나게 된 비평가 임나래 씨는 논리적이고 시각적인 것을 언어화하는데 능통했다. 내가 사용할 수 없는 단어들을 사용하고 숨겨진 내러티브를 구성하는데에 탁월했다. 그렇게 구성된 우리의 발표는 사실 신선하지도, 감각적이지도 않았지만 나는 내 작품을 언어화하는 일에 있어서 임나래씨를 통해 많은 영감을 받았다. (아마 나뿐이 아니라 이 페스티벌에 참가한 여러 작가/ 비평가분들이 서로에게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실제로 평론가, 큐레이터 분들과 레지던시나 전시 서문, 원고 등으로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평을 듣는 일이 자주 있고, 가끔은 나의 강한 조력자가 되어 주시기도 하며, 서로에 대해 영감을 주고받는 공생관계로 발전하기도 한다. 물론 때때로 오독으로 인한 뒤틀림도 발생하지만,
나의 사견으로는, 행사가 더 길고 , 더 다양한 분들이 참여하고, 기성작가, 평론가분들도 더 많이 오시고, 긴 토론 시간이 주어졌으면 좋겠고, 나처럼 서로서로 오가는 격한 토론을 기대하는 이들이 환호할 만한 일들이 벌어질 충분한 시간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17일보다 18일이 좋았고 18일보다 19일이 더 좋았는데, 오히려 19일은 오전 11시부터 시작되었다.
모든 것은 어떤 식이든 짧게라도 코멘트 되는 게 맞다고 본다. 반응을 하는거,
장이 열리면, 판이 짜지면 ,와, 신난다, 하고 그냥 나서면 된다. 그래서 페스티벌, 아닌가.
 
  
 
임나래 비평가
 
비평 페스티벌은 ‘비평’이라는 것을 예단하거나 제한하지 않고 행위 그 자체로 열어놓는 데서 시작했습니다. 이 출발점에서 작가와 비평가, 강연자, 그리고 청중 각자가 자유롭게 비평의 가닥을 펼쳐나갔고, 그것이 다시 때로는 부딪히고 때로는 조력하면서 여러 개의 매듭으로 엮여나갔습니다. 그렇게 엮인 발화들은 일견 임의적 조합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다양한 배경과 실행의 개인사를 가진 미술 주체들이 ‘비평’의 시공간을 공유하고 서로의 목소리를 들으며 쌓아나간 비평의 면면들이 임의성을 뛰어넘어 유기적이고 생생한 이 시대의 비평 현장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총괄기획
강수미 미학|미술비평|동덕여자대학교 교수
전담진행
비영리 단체 ART FREE
후 원
동덕여자대학교. 아트선재센터. 글항아리. 디자인 달
일 정
2015. 6/ 17(수), 18(목) 동덕아트갤러리
 
2015. 6/ 19(금) 아트선재센터 씨네코드 선재


상단 작품 캡션
좌) 시각정원 .visual garden part_130x70x200cm_식물, 나비,아크릴, 스텐_2014
중) 유토피아_mixed media_300x300x540cm, 2010
우) resize_Real fantasy_단채널_000400_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