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일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삶에서 느껴져야 한다고 말한다. 작업에서 삶이 느껴지는 것과 작업이 삶에서 느껴지는 것이 무엇이 다를까? 격 조사 ‘이’와 ‘에서’의 자리가 달라졌을 뿐인데, 김하일 작가의 삶과 작업에 대한 고민을 알고 나니, 그 차이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헌책을 통해 여러 갈래의 관계를 이어나가는 그의 < 책 속 메모 > 프로젝트를 소개한다.
시작은 헌책방에서였다고 한다. 작가가 무심코 꺼내 든 생 텍쥐페리Antoine Marie Roger De Saint Exupery의『어린 왕자』에 ‘어떤 오빠’가 ‘어떤 예원’에게 보내는 편지가 적혀 있었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의 편지에는 서로를 하염없이 예뻐하는 그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이 편지를 읽으면서 작가는 설렘과 함께 여러 감정이 휘몰아침을 느꼈고,『어린 왕자』가 아닌 연인의 편지를 사서 돌아왔다. 서울의 책방을 다니며 헌책방에 적힌 다른 이의 이야기를 엿보곤 했고, 이것이 이번 프로젝트〈책 속 메모〉로 발전했다.
김하일 작가는 프로젝트를 위해 9월부터 집중적으로 헌책방을 다니며 헌책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서울 신촌과 동대문 인근의 헌책방을 샅샅이 뒤졌고 가까이는 인천, 멀리는 대구와 부산까지 내려갔다. 그리고 책 한 귀퉁이에 적힌 전(前) 주인들의 글을 한낱 메모가 아닌, 그 자체로 한 편 한 편의 삶의 증언으로 보았다. 때로는 60년대, 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책 속 메모들이 전하는 삶의 단편선(短篇選)이 작가에게 그들의 삶과 내 삶이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 그래서 “시공간을 넘어 우리는 큰 세계에 공존하고 산다”는 공감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만약 이 메모들이 본디 자기 자리인 메모지나 편지에 적혔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그 메모는 영원히 개인의 소유로 남아 누군가에게 팔릴 일도 없었을 것이고, 낯모르는 타인에게 읽힐 일도 없었을 것이다. “생일 축하해”, “늘 예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에게”, “그대 울지 않기를”, “네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나와 너” 등 때로는 축하로, 고백으로, 때로는 우정 어린 격려로 당신에게 말을 걸 일도 없었을 것이다. 작가는 책 속 메모의 메시지가 삶과 삶,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는 듯한 울림을 주는 이유가 바로 ‘책’에 적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누군가의 정신적 과업의 결과물이 책이 소위 헌책으로 팔려나갈 때는 노끈에 묶인 ‘물건’이 되고 만다. 한 권의 책이 되어 세상의 빛을 보기까지 수반되는 역사와 맥락이 모두 제거된 채 물질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책에 적힌 메모를 발견하고 그 메모에 담긴 의미에 공감하며 헌책을 되샀을 때 그것은 물질이 된 정신을 정신으로 복귀시키는 일, 말하자면 이탈했던 책의 의미와 가치를 부활시키는 일과 같다.
그렇게 복권된 헌책들이 저자, 출판사, 판본, 메모의 내용 등 일련의 기준에 의해 한 차례 더 선택의 과정을 거쳐 홍대 인근 복합문화공간 ‘공상온도’의 전시장에 내보여졌다. 약 170여 권에 이르는 헌책 중 단 6권만이 전시되었다. 아크릴 박스가 씌워지긴 했지만 메모가 적힌 페이지가 펼쳐져 있었기에 관객이 글쓴이의 감성과 작가의 생각을 여과 없이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수십 곳의 헌책방에서 홍대의 어느 공간에 불려 나온 6권의 책과 6편의 메모에 대해 김하일 작가는 또 한 가지의 의미를 더했다. 바로 ‘사랑’이다. 작가는 < 책 속 메모 >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사랑을 주제로 작업해왔음을 깨달았다고 하는데, 이 사랑은 기존의 사전적 정의나 학문적 분류를 따르지 않는다. 에로스적 사랑은 물론 우정, 연민, 동정, 욕망, 욕심, 자기애 등 우리 감정과 생각을 이루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너른 의미의 사랑이다. 따라서 자신의 작업은 우리 삶의 면면에서 여러 사랑의 색깔을 찾아내 보여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이 작업은 한동안 이어지고 확장될 것이라 한다. “사라져가는, 없어져 가는 것들의 소중함”을 사랑으로 수집하는 김하일 작가의 행보를 기대하며, 그 길에서 작가가 만났던 위로의 말을 당신에게도 전한다.
여전히
맘 가득 답답해지는 바램들
그대 울지 않기를
슬퍼하지 말고
발걸음 멈추는 그곳에서
햇살 같은 웃음 웃으며
환하게 살아가길...
아프지 말기를.
- 늦은 가을비 온 후에
따스해진 햇살 속에서
여전히
맘 속 가득한 바램으로
99. 1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