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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앞 작은 문화예술프로젝트를 
지원하는 소액多컴 2016 선정작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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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면 나오는 연기 자판기〉 
이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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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9. 13. 3회 공연
홍대 앞 걷고 싶은 거리 뉴발란스 앞, 어울마당로 공원, 연남동 경의선 숲길 공원

10초만 걸어도 땀이 뚝뚝 떨어지는 무더운 여름날. 복사열로 달구어진 길 위의 행인이 바라는 물 한 모금. 예기치 않게 찾아온 복통 때문에 겨우 찾아간 화장실 앞에 당도한 이에게 간절한 휴지 한 장. 긴급하게 제출해야 할 공문서에 첨부할 증명사진이 부족한 상황. 이 모든 것을 단번에 해결해주는 것이 있으니 바로 자판기다. 적은 돈으로 당장 갈증과 배고픔을 해결해주는 것은 물론 자질구레한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자판기는 과히 현대인의 생활필수품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만약 버튼 하나 누르는 것만으로 ‘물건’이 아닌 ‘예술’을 손쉽게 쥐여주는 자판기가 있다면 어떨까? 팍팍하고 번잡한 일상의 중간에 잠시 웃고 쉬어갈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는 이런 자판기야말로 우리에게 정말로 요긴한 필수품이 아닐까. 홍대 거리 한복판에서 만날 수 있는 도시의 예술자판기, 이른바 < 누르면 나오는 연기 자판기 >를 소개한다.
 
2016년 5월 < 소액多컴 >(이하 소액다컴) 공모에 선정된 < 누르면 나오는 연기 자판기 >는 연극계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은지 연출가의 기획으로 시작되었다. 공연을 보는 게 재미있어서 연극을 시작했다는 작가는 배우로 시작해 점차 연출, 극작가, 거리 예술 공연 기획자로 활동 영역을 넓혀가는 중이다. 본인에게는 너무나 친근하고 재미있는 연극이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좀처럼 거리를 좁히기 힘든 대상인 것이 안타까웠던 작가는 “음료수 뽑아 먹는 것처럼 연기도 그렇게 보자. 우리가 찾아가자”란 의미로 프로젝트를 기획하였다고 한다.
 
판자를 이어서 증명사진 자판기와 비슷한 모양으로 만든 빨간 자판기가 홍대 인근 거리(걷고 싶은 거리, 어울마당로 공원, 경의선 숲길 공원)에 세워졌다. 행인이 자판기 입구에 드리운 검정 천을 걷고 자판기 안으로 들어가면 사이다, 환타, 코코팜, 에너지음료, 커피 중 취향에 따라 한 가지 음료를 고를 수 있다. 행인이 자판기에 돈을 넣고 음료를 선택하면 자판기 안에 있던 배우가 자판기 음료 칸을 떼어내고 등장한다. 그리고 각각의 음료수에 해당하는 창극, 음악극, 인형극, 연극 공연을 5분에서 8분간 펼쳐 보인다. 행인이 관객이 되고 자판기가 무대가 되는, 말 그대로 드라마틱한 장면이 일상에 찾아오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음료수가 사라진 자판기에서는 어떤 연기가 펼쳐졌을까? 사이다 맛은 “김중배의 다이아가 그리 좋단 말이냐”는 배우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 이수일과 심순애 >, 환타 맛은 소위 ‘썸 타는’ 기간에 남자가 먼저 고백하길 기다리는 여자들의 이야기인 < 고구마 썸 >으로 이어진다. 코코팜은 마스크 팩을 한 개가 사람으로 변신하는 이야기를 그린 (극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협찬받은 마스크팩을 대놓고, 그러나 재치 있게 광고하는 내용이다), 에너지음료 맛은 < 돈키호테 >가 꿈을 이루어야 한다는 내용을 노래와 함께 전하는 연극, 마지막 커피는 많은 이에게 친숙한 < 흥부와 놀부 > 이야기를 들려준다. 가족 단위의 관객 많았던 곳에서는 < 흥부와 놀부 >를 감상할 수 있는 커피맛이, 젊은 층의 관객이 많았던 장소에서는 < 돈키호테 >를 상연하는 커피 맛이 가장 많이 팔렸다고 한다.
 
이은지 연출가가 홍대라는 지역의 특성을 분석하고 관객층을 예상해 열심히 준비한 거리 공연이었지만 모든 일이 순탄하고 즐겁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걷고 싶은 거리의 어느 상점 앞에서 첫 번째 연기 자판기를 설치했을 때는 잡상인으로 오해받아 쫓겨날 뻔한 적도 있었다. 연극을 제작할 조건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모든 극의 내용을 직접 쓰는 것은 물론 자판기의 제작, 장소 섭외, 연출까지 혼자 감당해야 하는 등 여러 어려움이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갖추어진 극장이 아니라는 것은 반대로 모든 것을 자유롭게 전개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한 터. 이은지 연출가는 극장을 벗어남으로써 비로소 연극이라는 장르와 다소 연결점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홍대 거리에서 공연하기로 결정할 수 있었고, 의외의 장소에서 더 큰 호응을 얻을 수도 있었다고 자평했다.
 
< 누르면 나오는 연기 자판기 >는 완벽하게 세팅된 무대 위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극을 진행하는 극장은 아니었다. 편하게 등을 대고 앉아 합이 척척 맞는 대규모 단원들의 케미를 즐기는 블록버스터 형 연극을 상연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거리를 지나던 사람들이 일상의 예기치 않은 순간에 작은 공연과 짧은 연기를 보면서 눈앞의 배우와 교감하며 즐길 수 있는 연기를 제공했다. 그리고 연기 자판기를 나가는 관객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기획자와 배우 또한 행복과 만족감을 얻는 연극 공연을 판매했다. 거리 공연이지만 관객이 원하는 금액을 자판기에 넣고 공연을 관람하는 방식을 취하여, 누군가의 창작활동의 결과물을 감상하는 것에 대한 비용을 스스로 내고 예술작품의 가치를 되돌아보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아직 연극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연극의 재미를 찾아가서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던 이은지 연출가. < 소액다컴 >을 통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이 희망을 이루었다며 여기에서 힘을 받아 ‘연기 자판기’를 좀 더 발전시키고, 관객이 오감을 이용해 즐길 수 있는 극도 만들고 싶다고 한다. 다음에는 그가 또 어떤 맛있는 연기와 연극으로 관객을 찾아갈지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