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은 특정한 언어를 사용해 어떤 내용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나 쓰이는 순간 물질로 기록되는 글과 달리 말은 별도의 저장 매체가 없으면 이내 휘발된다는 점에서 둘은 타고난 운명이 다르다. 그런데 말과 글, 전달과 저장이 동시에 작동하는 매체가 있으니 바로 희곡이다. 희곡은 초연 이전에는 글로 쓰인 이야기로 존재하지만, 결국에는 무대 위에 올리어 글이 모두 담아낼 수 없었던 상황, 분위기, 정서, 교감 등을 현실의 시공간 안에서 전달한다. 같은 희곡 대본이더라도 연출가, 배우, 관객, 공연 장소에 따라 완전히 다른 옷을 입은 공연이 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희곡은 방송 매체인 라디오와 닮아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연출자나 진행자와 청취자 사이의 소통이 중요하고, 큰 틀 안에서 움직이되 방송이 나가는 매일의 상황에 따라 변화에 유연해야 한다는 점, 따라서 즉흥성과 현장성이 중시 된다는 점이 유사하다.
‘작지만 큰 책’을 만드는 희곡전문 포켓북 출판사이자 공연 제작사인 자큰북스(대표 김해리)와 공동체 라디오 방송을 표방하는 마포FM이 만나 기획한 < 길거리 라디오 >는 앞서 말한 희곡과 라디오 방송의 특성이 그대로 녹아 있는 프로젝트이다. 자큰북스는 스스로 새로운 관객을 만나고 그들에게 희곡을 경험하게 하려는 것, 마포FM의 입장에서는 다양한 지역밀착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방송사로서 시민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서려는 목적이 이 프로젝트의 일차적 목적이었다. 희곡 한 권과 녹음기 하나를 들고 마포구내의 동진시장, 서울 프린지 페스티벌, 연남동 경의선 숲길, 난지캠핑장에 찾아갔다. 준비한 희곡을 배우와 시민이 함께 읽어 희곡을 재탄생시킨다. 희곡 낭독 후에는 감상을 인터뷰한다. 그리고 이 과정이 녹음되어 실제 마로FM의 전파를 타고 방송된다. 공연의 무대이자 방송 스튜디오가 되는 공간을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길거리로 옮겨와 현장의 시민이 청취자/관람객이 되는 동시에 출연자/배우가 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다. 공연장, 책, 방송 스튜디오라는 평소 이들이 머무르는 닫힌 공간을 벗어나 다른 성격을 가진 네 곳의 열린 공간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자큰북스와 마포FM 팀은 마포의 역동성과 풍부한 자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재미있는 공간에 재미있는 사람이 모이고, 그만큼 다채로운 이야기를 발생시키는 곳이 마로 마포 지역의 긍정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채로운 이야기 하나하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경의선 숲길에서는 『연애사』(이오진 作)를 읽었는데, 극본이 연애 이야기인 만큼 실제 커플들이 참여하여 실감나고 생동감 있는 낭독 녹음현장이 되었다. 특히 한창 ‘썸을 타는 커플’이 프로젝트에 참여해 고백의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난지 캠핑장에서는 『침대 밑에 아버지』(김세한 作)을 낭독작으로 택했는데, 가족 단위 캠핑족보다 회사 동료나 친구들끼리 온 사람들이 많아 예상과는 다른 참여자들과 함께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한편 정치학과 학생 삼인방은 『우주인』(오세혁 作 )을 함께 낭독하며 청취자들에 함께 힘내자는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프린지 페스티벌에서는 『This is』(씨밀레 프로젝트 作)와 『제목 정하다 밤새겠네』(창작집단 툭치다 作)를 낭독했다. 이곳에서는 중학생 세 명이 참여했는데, 재미있는 프로젝트에 즐거이 참여하기도 했지만 또래들의 은어를 많이 사용하는 바람에 방송 전 편집에 애를 먹기도 했다고 한다.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한 마포FM의 류봄이는 ‘일반인에게 희곡이라는 장르가 생소한데다가 그것을 배우가 아닌 일반인이 소리 내어 읽다보니 방송 시에 전달력이 떨어진다는 점, 그리고 제한된 시간 때문에 희곡의 일부만을 다루다보니 전체 내용을 청취자들에게 이해시키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점’ 등에 아쉬움을 표했다. 그러나 < 길거리 라디오 > 프로젝트에 낭독자로 참여한 배우 권영지는 ‘참여한 시민들이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작품에 집중해 자연스럽게 몰입해가는 과정을 보고 오히려 많이 배웠다’고 밝히는 등 다양한 참여자들이 희곡 한 권을 매개로 새로운 경험과 감동을 나눈 프로젝트였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하겠다. 기획자에 따르면 비록 < 길거리 라디오 >의 두 번째 시즌은 만들어지기 어려워 보이나, 자큰북스와 마포FM은 앞으로도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함께 이야기를 만들고 나눌 이들을 찾아나갈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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