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될 것들에 대한 헌사
서정희의 < 울림상자 - Résonances >는 프랑스 피레네와 한국 제주도의 다르면서도 유사한 풍경을 영상 예술로 조명하는 작업이다. 작가는 두 지역의 사람과 몸짓, 그리고 색채와 소리가 서로 어우러지는 지점들을 특유의 정제되고 유려한 영상미로 보여준다. 현대는 지리적 경계와 물리적 거리가 무색하리만치 국가 간·문화권역 간 상호교류가 활발하며, 이에 따라 삶의 많은 부분이 비슷해져 가는 문화적 전지구화(cultural globalization)의 시대이다. 이런 추세에, 프랑스에서 수년간 거주했던 작가는 한국과 프랑스가 노인 인구의 증가로 인한 사회적 고령화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음에 주목하고, 양국 노인층의 삶과 일을 통해 두 문화가 어느 정도 떨어져 있고 동시에 얼마간 맞닿아 있는지를 사색하고자 했다. 갈수록 동질화되고 균질화되는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아직 자기의 방식을 고수하면서 살아가는 개인의 이야기를 발굴함으로써, 지금도 계속 사라져 가는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삶의 방식과 흔적을 기록하고자 한 것이다.
작가가 노년층에 특히 관심을 두었던 이유는 그들의 삶에 축적된 시간에 비례해 몸에 남겨진 흔적 때문이다. 이 흔적은 아주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일상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문화적 코드’라던가 ‘사회의 징후’ 따위의 뭉뚱그려진 개념으로 해석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따라서 작가는 이 흔적을 읽기 위해 노동이라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드러나는 몸의 언어를 추적하는데, < 울림상자 > 프로젝트에서 작가가 선택한 몸의 언어는 한국 제주도의 해녀와 프랑스 피레네 산맥의 염소목장주의 것이다. 노동의 현장이자 그 자체로 그들의 삶이 되는 바다와 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해녀와 목자의 하루는 오랜 시간 사람에게 먹고살 거리를 내주어 온 자연 속에서 정연하고 엄숙한 몸짓의 울림을 전한다.
전시는 직각을 이룬 두 개의 벽에 나란히 투사되는 세 편의 영상으로 구성된다. 먼저 제주도 신풍리 어촌계와 성산 일출봉에서 촬영된 하나의 영상이 약 5초 정도의 차이를 두고 양쪽 벽에 상영된다. 뒤이어 프랑스 피레네 산맥 자락의 르 클라(Le Clat)에서 촬영된 영상이 앞서와 같은 방식으로 상영된다. 병치되어 돌아가는 동일한 영상은 일상의 반복을 암시하는데, 단 몇 초의 시차가 만드는 좌우 세계의 미묘한 어긋남은 반복에 균열을 냄으로써 하루하루가 완전히 같은 날들은 아님을 일깨운다.
제주도에서 촬영된 영상은 전반적으로 일정한 원거리에서 관찰하는 시선을 취하는데, 해녀의 헤엄, 그릇, 말, 노래, 잊힌 도구들과 바위, 수목, 해양 동물 등 섬의 자연물이 교차하면서 강렬하고도 경쾌한 분위기로 그려진다. 작가는 해녀들이 물질 나갈 채비하는 모습, 망태기를 허리춤에 차고 자맥질하는 모습, 얕은 바다에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나누는 모습 등 그녀들의 일과를 세밀하게 담아내지만, 그녀들의 공간에 깊이 개입하지 않고 이방인으로서 경계선의 밖에 머무른다. 이에 비해 피레네 산맥에서 목장의 정경은 무거운 고요함을 풍기며, 목장을 운영하는 부부의 모습은 한발 다가선 거리에서 묘사된다. 목장 주인인 백발의 노인이 염소젖으로 치즈를 만들어 팔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따라가는 작가의 밀착된 시선은 노인의 움직임만큼이나 조용하고 섬세하다. 수없는 반복 끝에 근육에 각인된 노인의 손짓은 흔들림이 없다. 그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필요한 만큼의 결과를 만든다. 피레네의 웅대한 산맥에서 쉼 없이 이어지는 노동의 장면은 부산함이 아니라 절제된 노련함을 드러낸다. 서정희가 두 지역을 오가며 목격한 것은 표면적으로는 다른 문화, 다른 환경, 다른 일의 조건에서 흘러온 별개의 삶이다. 그러나 작가는 한층 더 들어가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선 이들이 삶을 대하는 정성과 진실함을 꼭 같이 가지고 있으며, 이제 막 피어나는 청춘에 못지않은 꿈틀거리는 생명력을 발산하고 있음을 바라본다.
전시를 구성하는 마지막 영상은 이번 프로젝트의 협업 작가인 장 줄리앙 푸(Jean Julien Pous)의 작품이다. 푸는 영상의 채도를 극단적으로 낮춰 제주도와 피레네 각자가 가진 특유한 빛을 제거하고 탈색함으로써 두 장소의 이미지적 연결을 꾀한다. 32분의 러닝타임동안 두 개의 풍경이 나란히 흘러가면서 발생하는 우연적인 소리의 겹침과 이미지의 접합은 양자의 이질성에 집중했던 서정희의 영상과 달리 양자 사이에 모종의 공모 관계마저 만들어낸다. 이를테면, 염소의 목에 달린 방울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해녀의 잠수 전 기도에 힘을 보태어 주거나, 해녀의 “이엿사나 이여도사나” 가창이 염소 우리를 치우는 목장 부부의 고됨을 대변하면서 공감각적 시의 세계가 펼쳐진다. 두 세계의 원본은 서로 다르고, 그런 탓에 각자의 아름다움이 더욱 돋보일 테지만, 닫힌 전시 공간(상자) 안에서 두 세계가 만나 발생하는 의도되지 않은 사후적 겹침이 공명(울림)하며 < 울림상자 > 프로젝트를 완성한다.
< 울림상자 >는 물리적으로 떨어진 두 지역의 사회적·문화적·개인적 맥락을 영상과 소리로써 교차시키는 다큐멘터리 영상에 가깝다. 그러나 “영상 작업을 할 때 결부되는 파이프라인들에서, 예상치 못하게 외부에서 개입해 들어오는 것에 의해 통제할 수 없이 달라지는 결과물에 관심 있다”는 작가의 말을 떠올려 보건대, 이 작업 역시 프로젝트에 결부된 다양한 주체와 요소들이 바깥에서 가져온 우연들이 맺어준 관계의 결과물로 볼 수 있다. 이질적 문화, 이질적 이미지, 이질적 언어는 우연을 환대함으로써 협력적 관계를 연다. 그렇게 시작되는 공유와 상호 이해는 작가가 의도했던 ‘사라져 가는 삶의 방식과 흔적을 바라보고 기록’할 여백을 제공할 것이다.
본 프로젝트의 미덕은 내용이나 주제의 참신함보다 결과적 생산물인 영상 자체가 보여주는 예술적 완성도와 심미적 감흥에 있다. 따라서 필자가 전시장을 찾았을 때, 외부의 빛이 들어와 영상의 세세한 부분들이 흐릿해지고 때로는 화면 속의 사물을 식별할 수 없게 만드는 전시장의 환경을 확인하고는 이에 대해 안타까움을 숨길 수 없었다. 프로젝트가 지원금을 신청할 때의 기획안과 전혀 다른 내용으로 중도 수정되면서 일정과 공간 섭외에 어려움이 있었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전시장을 찾은 관객이 마주하는 것이 벽면을 가득 채우는 영상뿐인 전시라면, 감상에 몰입할 수 있는 전시 환경을 꾸리는 것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하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본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촬영한 영상은 향후 단편 영화화의 작업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영화로 재탄생할 울림 상자의 이야기를 작업의 아름다움처럼 유쾌한 장소에서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